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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니seny Jul 23. 2021

서른 살 먹고 미팅하기 (하)

친구를 위해 나간 미팅이었는데, 결국 친구와 멀어졌다

 '서른 살 먹고 미팅하기 (상)‘에서 이어집니다.



    미팅 당일은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장소는 회사 부근 아웃백. 여직원들끼리 점심에 한 번 갔던 적이 있는 곳이었다. 그때만 해도 같이 밥을 먹으러 왔던 과장님 한 명은 이직해서 이젠 이 회사에 없었고 그 사이 해가 바뀌었다.


     미팅 시간은 애매하게 이른 저녁시간이라 시간 맞춰 나가려면 집에서 나가기 싫어질 거 같아 아점을 먹고 그냥 빨리 나가서 근처 커피빈에서 음악을 듣고, 책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P와는 시간에 맞춰 아웃백 입구에서 만났다. 그런데 사람이 왜 이렇게 많지? 알고 보니 반값 행사를 하는 날이라 했다. 다행히도 한 시간 전부터 와서 기다린 남자분들 덕분에 바로 앉아서 식사할 수 있었다. 게다가 런치는 다섯 시까지라 런치 주문도 가능했다.


      다섯 시 정각이 되어서야 늦게 온 한 분까지 도착했고 앉아서 자기소개를 하고 음식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이런 자리가 어색한 나는 별 말없이 속으로만 혼자 대꾸하다 '원래 별로 말이 없으신가 봐요'란 소릴 들었고 타이밍에 맞지 않게 너무 과도하게 웃었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할 만한 멘트도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2차로 자리를 옮겨 근처 이자카야 같은 곳에 갔다. 일요일 저녁이라 술 먹으면 안 되는데, 하면서 어색하기도 하고 술잔이 앞에 있으니 자꾸 마시게 된다. 그래도 술의 힘을 빌려 1차보다는 말을 좀 더 했다. 그러다 중간에 지방에 있는 집으로 내려가야 하는 P의 고향 친구는 먼저 일어섰고 나머지 사람들은 한참을 더 앉아있다가 일어났다.


     나는 사람 이름을 굉장히 잘 기억하는 편이다. 그런데 분명 그 자리에서 이름을 다 들었는데도 이상하게 미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자 P의 고향 친구 이름도, 미팅에 나왔던 남자분 3분 중 주선자를 제외한 두 명의 이름도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나마 남자 측 주선자 분은 내가 아는 사람이랑 성과 이름까지 완전히 똑같아서 외운 거였다.


      역시 나는 이런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구나, 란 생각만 다시금 들었다. 나는 내 의지로 서른 살 때까지 그 흔하다는 미팅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미팅을 '해봤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자리에 대해 목표의식이 강했던 P는 열심히 미팅에 임한 결과 그중 한 명과 2,3번 정도 데이트를 했지만 연인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미팅이 지나고 두어 달 뒤쯤 P가 내게 할 말이 있다며 만나서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얼핏 흘린 뉘앙스로는 남자친구가 생긴 거 같았는데 아마도 내가 아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리고 짐작은 맞아떨어졌다. 소개팅을 주선한 그 주선자 오빠와 사귀게 되었다고 했다.


     P는 미팅 전보다 솔직하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모임에서 만난 오빠라고 하길래 그냥 모임 내에서만 만났겠거니 했는데 이미 미팅을 하기 전에도 둘이 밖에서 따로 만나 영화도 보고 밥도 먹은 적이 있어 서로 어느 정도 호감이 있는 상태였던 것 같았다.


     그런데 친구는 미팅 전에 나에게 그런 말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P의 성격이 원체 조심스러운 면도 있고 그 분과 나이차도 있어서인지 그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좋게 생각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미팅하기 전에 둘이 따로 만나던 사이였다고 나한테 말하면 내가 미팅에 안 나온다고 할까 봐 일부러 말을 안 한 건 아니었을까?라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기분이 상했다.


     결국 연인이 되고 결혼을 한 둘에게는 이 미팅이 아주 좋은 에피소드로 남을 것이다. 우리 그때 같이 미팅도 하고 그랬었잖아. 근데 나는 다른 사람이랑 데이트도 했었는데 결국 오빠랑 결혼했네? 호호호, 이러면서.


     도대체 미팅 끝나고 나서 나한테 그 주선자 오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는 왜 물었니? 내가 만약 마음에 들었다고 하면 어쩌려고? 나는 그 남자분에 대해 별 느낌이 없었고 잠깐 뵀지만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 P는 강력하게 남자친구를 만들길 원해서 목적을 이루었으니 P의 연애를 축하해 주었다. 그렇지만 축하해 주는 것과 별개로 더 이상 그녀와 가까이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친구들 중에 유일하게 같은 전공이고 하는 업무가 똑같아서 업무 이야기도 하고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친하게 지냈던 친구였는데 친구가 나를 그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속상했다.


      하지만 P는 내가 이 일에서 느낀 어이없음을 살짝 표현하자 직접 지칭해서 말하진 않았지만 보통 '여자들은' 이런 일이 생기면 남자들과 달리 쿨하지 못하다고 했다. 이번 일을 두고 같이 미팅에 나왔던 남자분들은 크게 별 얘기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 간의 관계성과 나와 P의 관계성은 또 다른 문제라고 생각한다. 난 원래 쿨한 사람도 아닐뿐더러 내가 그 미팅에 참석했던 다른 참석자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는 간과하고 있었다.


     물론 결혼, 중요하다. 타이밍이 있다는 것도 안다. 친구는 그 시기를 놓치면 결혼하기 힘들 거라고 예언했는데 실제로도 살아보니 P의 말도 맞았다. 그래서 평소와 달리 적극적으로 행동한 그녀의 심정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아무리 연애와 결혼이 중요했을지언정 친구한테 좀 솔직할 순 없었던 걸까? 내가 그 정도로 못 미더웠을까?


     P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오빠와 결혼을 했으며 행복하게 잘 살았고, 아마 잘 살 것이다. 사실 최근엔 연락을 안 해서 모르겠다. 그녀는 나의 친한 친구였'었'다. 친구가 나에게 그렇게 행동했다고 해서 내가 P의 불행을 바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P는 결혼을 원했고 좋은 사람과 결실을 이루어냈으니 그 사람과 행복하게 살길 진심으로 바란다.


     내가 먼저 연락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친구에게, 나를 미팅 자리에 끼워 넣을 만만한 친구 정도로밖에 생각하고 있지 않는 사람에게 더 이상 먼저 연락을 하고 싶지 않았다. 가끔씩 친구가 먼저 연락을 했지만 나는 아무래도 시큰둥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서히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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