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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니seny Nov 27. 2021

비밀이 있는 삶

쉿, 제가 독립해서 혼자 산다는 것은 비밀입니다 

     올해 5월 중순쯤부터 혼자 살기 시작했으니까, 10월인 지금은 어언 독립 반년차가 되어간다. 하지만 가족 외에도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회사에 있는 그 누구에게도 독립했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걸 의도적으로, 굳이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보통 '혼자 산다' 혹은 '독립했다'라고 하면 세트로 나오는 질문들 때문이다.



자가야? 아님 월세나 전세? 
위치는 어딘데?
출퇴근 시간은 얼마나 걸려?


     그런데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은 부모님 명의로 되어 있는 집이다. 그래서 내가 독립했음을 알리게 되면 부모님의 경제 사정과 집 계약관계 등을 밝혀야 하는 불편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회사 사람들에겐 비밀로 하기로 했다. 다행히 독립하고 나서도 본가에서 회사에 출퇴근하는 시간과 별로 차이가 없고, 회사 내에 친한 사람이 없어서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다 보니 여태까지 들키지(?) 않고 잘 지내고 있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하나 조심해야 할 것은 출퇴근길에 이용하는 버스정류장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그래도 일주일 중에 이틀은 퇴근하고 곧바로 본가 쪽으로 운동하러 가기 때문에 원래 하던 대로, 남들이 다 아는 주소인 본가로 퇴근하기도 한다. 그나마 내가 8-5 출근제를 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직원들과 마주칠 일이 없어서 이것도 큰 걱정거리는 아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시간인 5시를 훌쩍 넘겨 거의 7시까지 야근을 하고 조금 늦게 퇴근하던 날이었다. 나는 독립한 집으로 가는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뒤에서 같은 팀 동료가 쓱 나타나더니 말을 걸어왔다. 



"어디 가요? 왜 여기서 버스 타요?"
"아, 집에 가기 전에 어딜 좀 들러야 돼서요"



    아뿔싸. 이 친구는 10-7 출퇴근제라 7시 정시에 퇴근하려고 나온 건데 내가 야근을 하는 바람에 그녀와 퇴근 시간이 겹친 것이다. 하필이면 나랑 가는 방향이 같다.

  

     집에 가기 전에 어딜 좀 들러야 된다고 얼버무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한다. 코로나 시국에 딱 하나 좋은 건, 이럴 때 마스크를 쓰고 있기 때문에 당황한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저녁 때라 어두워서 잘 안 보이기도 했다) 나는 여기서 좀 멀리 가야 해서 타야 하는 버스가 몇 개 없기에 내가 타야만 하는 특정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여기서 가까운 지하철역까지만 가도 돼서 정류장에 오는 아무 버스나 타면 된다. 그녀가 탈 버스가 왔고, 나보다 먼저 자릴 뜬다. 다행이다. 앞으론 야근할 때 그녀랑 퇴근하는 시간이 겹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시간이 흘러 10월의 어느 날 아침. 일이 있어서 좀 늦게 출근하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그런데 회사 근처에 다 와가는 길에, 그녀가 버스를 타는 정류장이 다가오니 그제야 생각이 났다. 그녀도 오늘은 나랑 비슷한 시각에 출근할 텐데 큰일 났네? 혹시 하고 많은 버스 중에 이걸 타면 어떡하지?


     정류장에서 문이 열리고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나는 밖에 서있는 사람들을 스윽 한번 둘러본다. 다행히 그녀는 없다. 그런데 내가 하나 간과한 게 있었다. 그 친구도 나처럼, 나와 비슷한 이유로 이용하는 버스정류장이 바뀌어서 더 이상 만나지 않겠구나.


     그녀는 사내연애를 하고 올해 말에 결혼한다. 이제 결혼식이 얼마 안 남았기 때문에 그들이 결혼한다는 소식은 사내에 다 알려져 있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결혼 준비를 진행했고 업무 시간에도 결혼식 준비와 관련된 이런저런 전화를 받으러 계속 자리를 들락날락한 끝에 준비를 마쳤다. 신혼집도 미리 구해서 가구도 다 들여놓았다. 결혼식보다 4달 정도나 미리 신혼집에 입주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나랑 막내에게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사실을 얘기했다. 어차피 올해 말에 결혼하고 집도 다 준비되어 있고 하니까 조금 먼저 같이 살고 있다고.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한텐 말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아무래도 사내커플이라 사내연애 사실을 초반에 들켰을 때도 부인하고 아닌 척하느라 힘들게 지냈는데, 결혼 전부터 동거한다고 하면 또 쓸데없는 말이 돌아서 피곤해질 테니까 그런 거 같았다.


     그녀는 9월부터 회사 사람들에겐 비밀로 하고 신혼집에서 출퇴근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나와 다른 방향에서 출근하고, 이용하는 버스정류장 역시 달라졌다. 그래서 더 이상 출퇴근할 때 마주칠 걱정을 안 해도 된다. 그 사실을 그제야 떠올리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의 비밀과 그녀의 비밀이 함께 더해져서 한층 더 큰 비밀이 되었다. 출근이라는 행위 하나를 두고도 사람들에게 알려진 사실과 반대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사실을 주위 사람들에게 들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에 묘한 긴장감마저 느껴진다. 나와 그녀 양쪽의 비밀을 모두 아는 나는, 이 독특하고 스릴 넘치는 기밀을 다루는 한 명의 특수 보안요원이라 생각하며 지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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