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니seny Oct 02. 2021

독립 첫날밤의 후일담

혼자 생활하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독립을 앞두고 불안했는지 며칠 전부터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지만 이사를 마치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그 증상은 사라졌다. 

 

 

    지난주 토요일이 어버이날이었다. 부모님은 동향 출신인데 고향에 가야 일이 있어 지방에 내려가셨고, 거기서 하룻밤을 자고 올라오셨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독립을 앞두고 있던 나는 그 덕에 원래 살던 집에서 독립 첫날밤 같은 느낌을 경험했다. 아마도 일주일 뒤에 이사한 집에서 혼자 잠들면 이런 느낌이겠구나 하고. 그리고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꽤 다른 느낌이었다.






      세입자가 빠지고 이사를 바로 가진 않았다. 청소업체를 불러서 청소를 한번 싹 할까 하다가 부모님과 나까지 성인 세명이니까 어떻게든 직접 청소를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공휴일인 어린이날에 이사 갈 집에 들러 바닥을 몇 번이나 닦고, 부엌과 화장실 그리고 방의 붙박이장 등 보이는 모든 곳들을 싹 다 청소했다. 혼자였으면 하루 종일 걸렸을 일이었겠지만(+몸살 났을 거 같다)셋이서 하니까 반나절만에 끝났다. 


     그리고 이사 전날, 인터넷 설치 기사님이 오시기로 해서 오후에 휴가를 내고 이사 갈 집에 들르기로 했다. 밥을 아주 많이 해 먹진 않겠지만 햇반만 먹는데도 한계가 있고 본가에서 계속 밥을 가져다 먹을 수도 없어서 작은 밥솥을 구매했다. 1인 가구인 나에게 딱 알맞은 앙증맞은 사이즈의 밥솥이었다. 이사할 때 밥솥이 먼저 들어가야 잘 산다는 속설이 있다고 해서 엄마가 밥솥을 먼저 들고 들어가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집에 밥솥을 신줏단지 모시듯 들고 들어가 썰렁한 부엌에 내려놓았다. 


나보다 먼저 우리 집에 입주한 밥솥 @ 새 집에서


     다음날, 토요일 오전 9시부터 이사가 시작되었다. 짐을 싸면서도 느낀 거지만 고작 나 한 명의 짐인데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1년 전에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그래도 짐을 줄였다고 생각했는데 난 아직 미니멀리스트가 되려면 멀었다. 미니멀리즘을 지향하고 있는 만큼, 다음번 이사 갈 때의 목표는 짐을 더 늘리지 않는 것 그리고 이번 기회에 가지고 있는 짐을 더 줄이는 것이다.


     부모님께 마무리를 봐달라 하고 먼저 차를 몰고 이사 갈 집으로 출발해서 트럭을 맞이했다. 짐을 들여놓는 일은 더 빨리 끝났다. 짐이 들어오는 대로 조금씩 풀어놓다가 점심때가 되어 밥을 먹으러 나갔다. 이삿날이니까 왠지 중국음식을 먹어야 할 것 같아 근처에 있는 중식당에 가서 점심을 맛있게 먹고 나오는데 아침부터 잔뜩 흐렸던 하늘에 비가 온다. 다행이다. 비가 오기 전에 이사가 끝나서. 


     다시 집으로 돌아와 나는 작은방과 안방을 왔다 갔다 하며 이것저것을 치운다. 엄마는 부엌을 맡아 각종 집기와 음식 등을 정리한다. 엄마는 밥솥으로 밥 하는 걸 알려 주시고는 '우리가 가야 네가 편하게 쉬니까 이것만 봐주고 얼른 갈게'라고는 말을 연신 했다. 그리고 25분 뒤 밥이 되는 걸 보고 부모님은 본가로 돌아갔다.


     갑자기 혼자가 되었다. 시끌벅적했던 집안이 조용해졌다. 하지만 나는 아직 할 일이 있기에 바빴다. 오늘 안에 저 상자에 담긴 것들을 다 치울 생각이기 때문이다. 아주 깔끔하게 정리할 건 아니고 그냥 서랍장과 책장에 다 넣기만이라도 하자는 게 목표다. 어찌어찌 목표한 대로 여섯 시까지 짐 정리를 모두 끝냈다.


     이상하게 발바닥이 아프다. 짐도 다 치웠고 땀을 흘려 찜찜해진 몸을 씻으려고 샤워실에 들어갔다. 샤워를 하려는데 아무리 해도 찬물밖에 안 나온다. 관리실에 물어보기도 왠지 민망하고 몇 시간 전에 돌아간 엄마한테 전화한다고 해결이 될 것도 아닌 거 같아 그냥 찬물로 샤워를 했다. (보일러 온수를 켜야 하는 건가?) 머리는 겨우 감고 아무리 더워도 찬물을 몸에 막 부을 순 없어서 손에다 물을 묻힌 다음에 몸을 슥슥 닦는 정도로 마무리했다.


     씻고 나와서 저녁을 먹었다. 아까 엄마의 도움을 받아지어 놓은 밥과 김치를 놓고 참치캔을 따고 김을 하나 딴다. 냉장고에는 집에서 가져온 김치와 물김치, 참치캔 그리고 내가 아침 대용으로 먹는 작은 우유밖에 없다. 과자도 먹고 싶고 맥주 한 잔도 하고 싶은데 사러 나가기가 귀찮다. 여기는 아파트 단지 내에 슈퍼 하나, 편의점 하나가 없어서 뭘 살려면 좀 걸어 나가야 한다. 


     가족과 살 때도 가족들이 고향에 가거나 외국 여행을 가는 등 집을 비울 때 혼자 지낸 날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도 그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뭔가 어색했다. 그래서 왜 어색한가 생각해봤는데 집이 너무 조용했다. 내가 왔다 갔다 하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여태까지는 항상 누군가가 집에 있었다. 심지어 내가 자고 있을 때도 누군가의 뒤척이는 소리나 코 고는 소리, 숨소리가 항상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보일러 홈통에 떨어지는 빗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자취한다는 직원이 집에서는 항상 블루투스 스피커에다 음악을 틀어놓고 있다고 해서 왜 그런지 이해를 못했는데 이제야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었다. 나도 음악을 좋아하지만 집에서는 듣다가 끄는 편이었는데 이 적막을 채우기 위해선 뭐라도 틀어놔야 했던 게 아닐까.


     부모님이 떠나고 혼자 남겨지니 내가 갑자기 이 공간에게 지배당하는 느낌, 압도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나 하나로는 채우기 어렵다는 느낌. 내가 살기에 조금 넓은 공간이어서 누군가가 왔다 가면 그만큼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한 시간이 더 필요한 거 같다. 아예 작은 집이면 좀 더 극복이 쉬우려나? 아니면 집의 크기와는 상관없는 것일까? 밀물이 밀려왔다가 훅 썰물이 밀려나가는 느낌이었다. 


     이사를 하게 되면서 느낀 건데 이 이사라는 게 최근의 나에게 굉장히 큰 이벤트였다. 요즘의 나는 일직선 같은 삶을 살고 있다. 크게 힘든 일도, 어려운 일도 없고 그렇다고 기쁜 일도 없는 그냥 무색무취의 삶. 그런데 이 이사라는 이벤트가 나에게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월세와 관리비만큼을 내가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는 책임과 동시에 혼자서 마음대로 하며 지낼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는 자유. 두 가지를 양쪽 추에 두고 아슬아슬하게 저울질하며 지내야 하는 긴장감이 생긴 것이다.


     생활비를 감당하려면 돈을 벌어야 하고 -> 그러려면 회사를 다녀야 하고 -> 그렇다면 그냥 다니는 게 아니라 쫓겨나지 않도록 잘 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회사를 '잘' 다녀야 하는 이유가 생긴 것이다. 이것은 꼭 회사를 다녀야 된다기보다 무엇이든 상관없이 회사를 다니든 일을 해야 하든지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는 나의 공간이다. 앞으로 있을 여러 변화-공부, 이직 등-를 준비하면서 비상을 앞두고 있는 나의 공간. 계약기간이 끝나는 1년 뒤 혹은 2년 뒤의 나에게 미안해하지 않도록 열심히 살 것이다. 살림은 본격적으로 해 본 적이 없으니까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하지만 요리는 최대한 해 먹어 보려고 할 것이고 외국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이제는 좀 정착할만한 일을 찾아보고 도전해보려 한다. 






     토요일에 이사를 했기에 다음날이 일요일이라 부모님이 한번 더 오셨다. 반찬이 별로 없기에 엄마가 된장찌개 레시피를 알려 주면서 같이 만들어봤다. 재료를 다듬고 국물을 내고 하면서 중간중간 도마를 씻고 싱크대를 치워야 했다. 쓰고 남은 재료들 또한 잘 싸서 냉장고에 다시 넣어둬야 한다. 별거 아닌 거 같아 보이지만 은근히 손이 많이 갔다. 


     그리고 확실히 혼자 먹는 밥은 맛이 없었다. 그래서 배불리 먹지 못했다. 이것도 시간이 해결해주는 걸까? 아참, 냄비 한가득 끓인 이 된장찌개는 거의 일주일 내내 먹어도 남아(양을 너무 많이 잡았다) 그대로 냉장고로 직행했고 결국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엄마가 샤워기에서 찬물이 나오는 문제를 해결해줬다. 나는 무서워서 보일러실에 들어가 볼 생각도 하지 못했고(들어가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다) 엄마가 보일러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며 A/S 신청을 위해 모델명을 확인하려고 보일러실에 들어갔다. 그런데 보일러 아래쪽 금속판을 열어보니 '작동 중'에 불이 깜빡이고 있었고 난방과 온수 중 선택하게 되어있어 온수로 돌렸는데도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았다. 


     전자기기가 작동하지 않을 땐 전원을 껐다 켜라는 간단한 원칙에 따라 전원을 껐다 켜봤다. 그러자 '작동 중'에 들어온 불이 더 이상 깜빡이지 않았고 온수를 선택한 후 다시 물을 틀어보니 따뜻한 물이 나왔다. 



난 아직도 어른이 되려면 멀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독립을 앞두고 나에게 쓰는 다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