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차가운 여름밤>, 오지은
차가운 여름밤 날 위로해주는 벽
잠시 눈을 감고 나는
사랑한다 아니다 사랑한다 그러다
허공에 허무한 한마디
사랑해
차가운 여름밤 또 혼자인 새벽
잠시 손을 뻗고 나는
전활건다 아니다 전활건다 그러다
허공에 허무한 한마디
미안해
나를 사랑한 당신은 없고 당신을 사랑한 나는 있고
아직은 조금 더 있어도 되나
이런 밤은 이어지고 나는 아직 여기 있고
우두커니 어둠속에 아직 조금 약한 인간
예이예이예
아픔을 알수록 따뜻해지는건
이별이 주는 단 하나의 선물일까 아닐까
선물일까 그러나
허공에 허무한 한마디
<차가운 여름밤>, 오지은
2014년 6월 28일의 기록.
6월의 마지막 금요일이다. 13일의 금요일도 무사히 버티고 어느새 유월도 지나가버렸다. 그러고 보니 유월의 느낌을 노래한 나루의 <June Song>을 그렇게 열심히 듣겠다고 해놓고 정작 제대로 들은 건 몇 번 안 된다.
나는 항상 이런 식이다. 곁에 있을 때 충실해야지, 하다가도 결국 내년 유월을 기약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미쟝센단편영화제가 개막하기 때문에 영화제 메이트인 JS를 만나 주말에 영화를 본다. 영화를 보고 나서 저녁을 먹거나 맥주를 한 잔 하게 되면 이런저런 사는 얘기를 나누다 문득 '한 해의 상반기가 지나갔구나'라는 생각이 들곤 하는 것이다. 나에겐 유월이 그런 시점이다.
나나 JS나 오늘은 참 힘들게 영화관에 도착했는데 친구는 상영시간보다 1분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첫 번째 영화를 보지 못했다. 오늘 본 영화는 단편영화모음이었는데 일단 영화가 시작되면 입장이 안되고 한 단편영화가 끝나고 그다음 영화가 시작되는 사이에만 입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단편영화는 주변에서 한 번 정도는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미래의 나에게 생길 일일지도 모르지. 인생의 일부를 함께한 사람인데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냉정해질 수는 없을 거다.
두 번째 이야기는 엄마의 엄마와 엄마 그리고 딸 3대에 걸친 이야기였다. 마침 며칠 전에 외할머니가 집에 다녀가신 관계로 사실 그렇게 막 별 내용은 아니었는데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사실 첫 영화부터 눈물이 좀 고였었는데 흐르진 않다가 그게 두 번째에 폭발하게 된 것이다. 나도 결혼을 해서 애를 낳을 수 있을까? 그럼 그 애가 또 애를 낳을까? 그럼 나는 엄마의 엄마가 되는 건가? 아니 그전에 누굴 만날 수나 있을까?라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리고 엄마가 엄마를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도 함께 떠오른다.
세 번째 영화는 브로콜리 너마저의 '환절기'를 생각나게 하는 '간절기'라는 제목의 영화였다. 흔히 보는 연인의 싸움. 서로 눈앞의 일들이 힘드니 일단 그것들부터 처리하고 한 달 뒤에 만나기로 한다. 그런데 상황이 변해버렸다.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상대방이 워낙에 잘해주니까 그냥 그렇게 마무리된 것이었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다. 나루를 닮은 듯한 소년소년한 남자주인공, 가난하지만 그래도 착하고 마음 씀씀이가 좋은 사람이었다.
네 번째 영화는 '4학년 보경이'라는 제목의 영화였는데 나는 4학년이라고 해서 계속 초등학교 4학년을 떠올렸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내가 가장 최근에 겪은 학생은 대학생이고 거기에도 4학년이 있는데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김꽃비 배우와 구교환 배우가 나오는 영화로 황당한 스토리들이 이어지고 90년대, 2000년대 초반을 떠오르게 하는 정감 돋는 선곡들까지 짱짱맨. 내가 좋아했던 카드캡터 체리의 주제곡과(ㅋㅋ) 영턱스클럽의 '정'의 가사와 미묘하게 맞물리는 영상이 웃음을 더했다. 곁에 있는 사람에게 잘해야겠지. 소중할 때 소중한 걸 모르고 깝치다가는 나중에 후회한다.
나는 맥주를 한 잔 하고 싶었는데 친구는 저녁을 먹고 와서 그런지 별 얘길 안 하길래 그냥 커피숍에 들어갔다. 아까는 분명 더웠는데 밖으로 나오니 생각보다 공기가 너무 쌀쌀했다. 얼른 가디건을 꺼내 입었다. 카페에선 핫초코와 로티번을 시켜놓고 짧게 수다를 떨었다.
배가 고파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로티번을 후루룩 먹고 여름이라 핫초코는 별로이지 않을까 했는데 오히려 좋았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우리는 작년에도 이맘때쯤 만났었고 그 작년에도, 그 작년에도... 이 영화제가 용산에서 할 때는 용산 CGV에서 영화를 보고 한참 맥주 마실 곳을 찾아 헤매기도 했었고 작년에는 이수역 주위를 맴돌았었다.
카페 마감 시간인 11시가 다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7호선을 타고 두 정거장을 지나 숭실대입구역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그 정류장에서 버스를 같이 탄 남자가 우리 집 바로 전 정류장에서 내렸다. 꽤 먼 거리를 함께 왔기 때문에 기억에 남네.
랄라스윗의 음악이 생각났다. 미묘한 감정을 다룬 영화를 보고 나니 서정적인 음악이 땡기나 보다. 가사들이 폐부를 찌르다 문득 차창에 비친 내 얼굴을 본다. 창문에 얼굴이 비치는데 마치 텔레비전에서 범죄자들의 눈을 모자이크로 가리듯이 내 눈 부분이 차창의 시꺼먼 틀로 가려져있다. 고로 눈 부분이 모자이크 처리된 얼굴이 비친다.
엘리베이터에서도 가끔 그런 경험을 한다. 다들 눈 둘 곳이 없으니까 괜히 천장을 쳐다보거나 요새는 다 스마트폰을 쳐다보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고개를 들어 정면을 봤는데 엘리베이터 중간쯤에 있는 불투명한 선이 내 눈부분과 겹쳐지면서 꼭 내 눈을 모자이크 처리한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되어서 가끔은 그 선을 쳐다보고 있기도 한다. 내 키가 딱 그 정도에 적당한 선인지 그런 일이 종종 있다.
집 앞 정류장에서 내릴까 하다가 밤공기를 쐬며 일본가수 오오츠카 아이(大塚 愛(おおつか あい))의 '연애사진(恋愛写真)'이라는 노래를 들으면 정말 좋을 것 같아 한 정거장 전에 내렸다. 바람이 시원하다. 아까 영화 보고 나왔을 때는 굉장히 쌀쌀하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지금은 더 늦은 시각인데도 기분이 상쾌했다.
인적이 드문 밤 길, 집으로 가는 길. 이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오오츠카 아이의 맑은 목소리가 이어폰을 타고 울려 퍼진다. 거리에는 아무도 없어서 나는 노래를 조용히 따라 부른다. 크게 따라 부르고 싶지만 건너편 편의점에는 여름밤을 맞아 사람들이 나와서는 옹기종기 앉아있다.
노래가 거의 끝나는 순간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 앞에 도착한다. 차가운 여름, 밤을 걷는다. 오지은 2집에 <차가운 여름밤>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오늘 영화를 보고 여러 생각을 하고 밤 길을 걸어오면서 그 '차가운' 여름밤이라는 의미를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이제는 진짜로 그게 뭔지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