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사랑에 빠진 나>, 가을방학
2016년 2월 13일에 쓴 글입니다.
수요일까지는 설연휴였고, 팀장님 없는 이틀 출근하고 나니 다시 금요일이다. 야호!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퇴근길에 병원에 잠시 들르고 그 김에 오랜만에 카페에 가기로 했다. 그런데 카페에 갖고 가서 읽을 책이 없네? 지난번에 대출연장 하는 걸 까맣게 잊어버리고는 신나게 일주일 뒤에 책 반납하러 갔다가 강제로 대출정지가 됐었지. 그러면 집에 있는 책 중에 챙겨 가야 한다.
출근 전 바쁜 아침 시간, 오늘 외출에 어떤 책을 가져가야 하나 빠르게 책상 위를 스캔하다가 저기 책상 아래쪽에 박혀서 보이지도 않는데 뭔가 생각이 나서 그 자리를 들춰보니, 있다.
약 1년 전 그러니까 작년 1월의 미팅 실패 후 바로 2월 초에 야심 차게(?) 참가했던 책 교환 모임에서 교환해서 받은 김연수 작가의 책이었다. (야심 차게 참여했던 것 치고는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여러 사람들이 갖고 온 책 중 내가 더 갖고 싶었던, 선순위에 있던 책들이 있었지만 선택 순위에서 밀리고 밀려 그나마 손에 쥔 책이었다. 산문집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기존에 출판했던 책 내용의 일부와 그에 관련된 대담집이어서 조금 실망한 채로 읽다가 내버려 둔 책이었였다. 마침 책갈피가 꽂아져 있어서 슬쩍 들춰보니 또 첫 문단은 맘에 드네. 그래서 가방 속에 쏙 넣었다.
그리고 점심시간에 집에서 싸 온 유부초밥을 먹으며 이것저것 검색을 하다가 영화 '캐롤'에 대한 평이 좋은 걸 발견했다. 혹시나 해서 여의도 CGV를 검색해 봤더니 역시나 있었다. 영화관이 회사에서 걸어서 10분도 안 걸리니 영화관에 자주 가게 된다.
개봉 전부터 알고 있는 영화였지만 영화에 대한 키워드가 '동성애' '레즈비언'이어서 볼 생각도 안 한 영화였다. 그런데 사람들 평이 너무 좋네? 영화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같은 느낌인가? 마침 영화가 카페에서 충분히 시간을 보내고 나서 볼 수 있는 괜찮은 시간대에 있어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예매해 버렸다. 동성애면 어때. 어쨌거나 사랑은 사랑이니까.
시간 맞춰 영화관에 입장했다. 자리가 맨 구석탱이 밖에 안 남아서 하는 수 없이 거기로 했는데 상영관 자체가 그리 크지 않아서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벽에다 머리를 기대고 편하게 볼 수 있어 좋았다. 영화는 아름다웠다. 아름다움이 지나치면 짜증 나는데 그렇지 않고 적당히 절제된 아름다움이었다.
1950년대의 고풍스럽고 딱 떨어지는 듯한 소품들과 거리, 옷, 색감이 좋았다. 드르륵 필름을 넣고 감는 카메라도 좋았다. 어렸을 때 집에 있던 카메라의 필름을 갈아 끼웠던 기억이 났다. 우리가 아는 건 그 사람에게 끌리느냐 아니냐 뿐. 자신이 원하는 바를 알고 또 원하는 것을 얻어낼 줄 아는 캐롤이 멋있었다. 영화에 흐르는 음악도 너무너무 좋았다. 수많은 대사보다 마지막 장면에서 둘의 눈이 마주쳤고 그게 그 모든 것을 다 말했다(고 볼 수 있다).
영화관을 나와 집으로 가는 길. 며칠 전부터 계속 머릿속을 맴돌던 가을방학의 '사람의 홍수 속에서'를 들어야겠다 싶어 MP3를 찾았다. 이어폰을 찾아서 꽂고(알고 보니 이어폰은 겉옷 주머니 안에 있었다) MP3 전원을 켰고 이어폰을 찾다가 손에 걸렸던 막대사탕을 꺼내서 입에 물었다.
영화 속에서 캐롤과 테레즈는 담배를 그렇게 펴댔는데 그걸 보고 나와서 그런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나는 막대사탕을 담배처럼 쪽쪽 빨았다. 며칠 전에 아무 생각 없이 막대사탕 하나를 사서 가방에 넣어뒀었는데 마치 내가 이렇게 될걸 알고 미리 준비해 놓은 건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로 딱 맞아떨어졌다.
밖으로 나오니 비가 아예 그친 건 아니지만 우산까지 쓸 정돈 아니어서 기분 좋게 걸었다. 지금 사랑을 하고 있지 않은 건 조금 분통하다고 생각했다. 사랑을 해본 게 도대체 언제였나. 좋아하는 사람의 눈을 똑바로 보고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얼마나 용감한 일인가.
그러고 보니 이번 주말은 사랑이 넘실댄다는 그 발렌타인데이네. 그래서 오늘 저녁에 유독 '사랑'이라는 키워드에 집착했나 보다. 안 그래도 아까 카페에서 읽었던 김연수 대담집에서도 그런 얘기가 잠깐 나왔었다.
저의 기본적인 태도도
타인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거예요.
깊은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더욱 이해하기가 어려워지다가
사랑하는 순간부터는
이해 불가라고나 할까요.
(김연수 작가 대담집 중)
아무튼 지간에 꼬이라는 남자는 안 꼬이고 막대사탕을 꼬나물고 있는 게 담배처럼 보였는지 버스정류장에서 웬 노숙자 아저씨가 말 거는 바람에 식겁했다. 솔루션스의 'L.O.V.E'를 틀어놓고 반복재생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페퍼톤스의 '검은 우주'를 들으며 한 정거장 전에 내려 걸어왔다. 올해는 사랑, 할 수 있을까? 사랑, 그 이름 누가 말했나.
사랑에 빠진 나의 눈엔 꽃물이 들어
그이의 손을 잡고 걸어가네 걸어가네
사랑에 빠진 나는 꿈처럼 아름다와
그이는 나를 보며 미소짓네 다정스레
사랑에 빠진 나의 숨엔 하늘이 가득
그이의 품에 안겨 떠오르네 떠오르네
사랑에 빠진 날은 모두가 나를 알아
누구나 나를 보면 미소짓네 다정스레
난 이제 슬픈 노랫말은 믿지 않을래
웃으면서 울지도 않을래
난 이제 슬픈 추억 모두 흘려보낼래
그대 내 손 놓치지 말아요
사랑에 빠진 나의 마음속 오랜 멍은
그이의 숨이 닿아 사라지네 사라지네
사랑에 빠진 나는 꿈처럼 아름다와
거울은 이런 나를 비춰주려 하지 않네
제발 내 곁에 있어줘
오래된 벽처럼 말없이 있어줘
<사랑에 빠진 나>, 가을방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