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에서 심야영화 보기
2013년 어느 여름날의 기록.
'심야영화 로망'에 대한 정의
심야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을 소망으로 가지고 있는 것.
나는 2008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자원봉사자로 활동한 후부터 영화 보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그전에는 1년에 영화관을 가는 것이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일반 영화관뿐만 아니라 보고 싶은 영화를 보기 위해 독립영화관을 찾아가기도 하고 영화제를 방문하기 위해 전국을 누비고 다니기도 했다.
웬만한 곳은 다 가보았는데 아직 우리나라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부산국제영화제에 가보지 못했다. 원래는 2012년 9월까지 회사를 다니고 바로 부산으로 내려가 여유 있게 10월 초 내내 열리는 부산국제영화제에 가려고 했었다. 영화도 보고 도시 구경도 하려고 마음먹었지만 퇴사 시점이 뒤로 밀리게 되면서 자연스레 부산 방문도 없던 일이 되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동하는 시간이나 거리가 꽤 되지만 언젠가는 꼭 이루어보고 싶은 소망이다. 이건 '몇 날 며칠을 부산에서 머물면서 여유롭게 영화제 구경하기'라는 로망이다. (덧. 부산에 머물면서 여유롭게 영화제 즐기기, 까지는 못했지만 나중에 3년 연속으로 부산영화제를 보러 가긴 했으니 반쯤은 이룬 셈.)
어쨌든 직장인이었던 나는 주말의 조조영화나 퇴근 후에 영화를 보러 다니곤 했다. 심야영화가 있다는 것은 알았고 꼭 가보고 싶었지만 혼자 다니는 나에겐 사치였고 로망에 불과했다. 심야영화는 밤에 상영하니까 생각보다 관객이 많지 않아 상영관이 여유로울 것 같았다. 거기에다 영화를 보고 나와 맥주 한 잔 하면 크- 정말 최고지 않을까 하는 상상까지. 그러나 우리 집엔 통금이 있어서 밤늦게 집에 들어갈 수 없었기에 도저히 이루지 못할 꿈같은 거였다.
그렇기에 친구와 ‘제천국제음악영화제’를 방문하면서 심야영화를 보게 된 것은 매우 기쁜 일이었다. 우리도 처음엔 별 생각이 없었는데 마침 보고 싶은 영화들을 심야영화란 이름으로 묶어서 상영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딱히 보고 싶은 것들이 없어서 늦잠 자고 일어나도 문제없으니 타이밍이 잘 맞았다.
심야상영은 3편을 묶어서 내리 상영하고 밤 12시부터 다음날 아침 5시 정도까지 진행되었다. 영화 중간에는 20여분 정도의 쉬는 시간이 있으며 중간에 간식도 준다고 했다. 영화 3편을 모두 감상하면 5시가 넘어서 끝나지만 마침 우리가 보고 싶었던 영화는 앞의 두 개였기에 우리는 두 편만 보고 극장을 나오기로 했다.
제천에 도착해 택시를 잡아 예약해 놓은 숙소에 들러 짐을 풀고 재빨리 샤워를 하고 극장으로 갔다. 보통은 씻고 잘 시간이었고 금요일 저녁이라 일주일치의 피곤이 몰려왔지만 그래도 평소에 해보고 싶었던 것을 드디어 해본다는 기대감과 영화제 첫날이라는 설렘이 있었다.
표를 받고 자리에 착석했다. 심야영화는 3편을 묶어서 상영하는데 우리는 그중 <헝키도리>와 <브루클린 브라더스> 두 편만 보기로 했다. 음악 영화제라는 이름답게 영화에는 모두 음악과 관련된 내용이 주요한 줄거리가 되어 진행되고 있었다.
<헝키도리>는 영국의 한 시골 학교를 배경으로 한 영화로, 학생들을 모아 합창단을 만들어 공연을 하려고 하는 선생님의 이야기가 나온다. 영국 영어 특유의 억양, 부족해 보이고 관심 없어 보였던 아이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하모니, 집 앞 선베드에 누워 여유 부리는 장면 등이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잠시 휴식시간 및 간식시간이 주어졌다. 영화제 후원 업체에서 제공받은 음료수와 찐 옥수수를 받았다. 꿀맛이었다. 영화 보면서 졸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쌩쌩했다. 친구와 극장 로비에 앉아서는 아까 기차 타고 제천 내려오면서 옥수수 얘기 했는데 진짜로 옥수수를 받으니까 신기하다며 맛있게 먹었다. 그러다 무슨 얘길 했었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친구가 웃음이 빵 터졌다. 그걸 본 나도 웃겨서 사람도 별로 없는 로비에서 서로 미친 듯이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그때 도대체 무슨 얘길 했었더라? 정말 별로 안 웃긴 얘기였는데도 단지 모든 것이 가라앉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한 새벽이라는 이유로 그랬을까? 마치 여고생 때의 우리가 별 것 아닌 일에도 깔깔거리며 온 세상이 떠나가도록 웃었던 것처럼 이유를 대기 어려운 웃음 말이다. 간식을 다 먹고 잠깐 거리에도 나가봤는데 시원하고 조용했다. 약간 무서워져서 다시 극장으로 들어왔고 이어서 두 번째 영화를 감상했다.
두 번째로 본 영화는 <브루클린 브라더스>였다. 주인공 남자는 음악을 하고 싶지만 일이 잘 안 풀리다가 어린이용 실로폰과 장난감으로 연주하는 약간은 사이코 같은(ㅋㅋ) 친구를 만나 한 팀을 이루게 되고 공연 여행을 떠나게 된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그 둘이 여행을 떠나기 위해 사이코 친구네 집 차고에서 할아버지 차를 몰래 빌려 타고 나와 도로를 천천히 달리면서 즉석으로 연주를 하며 음악을 만들어내는 장면이었다. 먼저 기타를 치고 그걸 듣고 다음에 실로폰과 뿡뿡 소리가 나는 장난감 소리를 얹어 멜로디를 만들어냈다. 그것들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흘러갔고, 잘 맞는다고 생각한 그들 역시 계속 연주를 이어나갔다.
공연 중간에 그들과 함께 하겠다는 여자 매니저를 만나 같이 여행을 하고 또 사건 사고를 만들고 결국 힘들게 도착한 경연대회장에는 입장도 못 하지만 입구에서 자신들만의 음악을 연주하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영화를 보고도 여운이 계속 남아서 유튜브를 뒤져 영상을 찾아내고, 인터뷰를 찾아내며 음악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나 아쉬워했다.
우리는 마지막 영화를 보지 않을 것이라 두 번째 영화를 보고 나오니 새벽 4시쯤 되었다. 친구와 함께 제천 시내를 걸어 숙소로 향했다. 시내라지만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 차도 거의 지나다니지 않고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우리를 보고 휘파람을 불어대며 엄청난 속도를 자랑하며 지나간 폭주족이 있었다.
혼자였으면 절대 못/안 왔을 텐데 친구와 함께라 다행이었다. 영화에 대한 감상에 젖어 새벽 공기를 맞으며 걸어가는 기분은 참 좋았다. 심야영화를 보기 참 잘했다고 생각했고 앞으로 남은 영화제 일정도 기대가 되었다. 로망의 경우 대체로 로망으로만 간직하는 것이 좋은 경우도 있는데 이번 로망은 성공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