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니seny Mar 18. 2022

5개 국어로 숫자 세기

외국어를 배우는 것의 쓸모란?

     사무직의 직업병으로는 안구건조, 거북목, 어깨 뭉침, 다리 부음, 허리디스크, 손목 터널 증후군  다양한 것들이 존재한다. 사무직으로 근무한  10년이 넘어가는 나도 위에 나온 증상들을 거의  가지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여기에 더해 오른손의 중지 손가락 끝이 찌릿찌릿 아프기 시작했다.


     몇 년 전에도 똑같은 증상이 나타났던 적이 있어서 정형외과에 갔었다. 그때 진통제와 함께 손가락에 끼우는 작은 부목을 받아 왔었다. 손가락 부목을 잘 때마다 끼웠더니 괜찮아져서 잘 지내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걸 해봐도 손가락이 낫지 않았다. 일 하는데도 불편한 데다 난 브런치에 글을 작성하거나 블로그에 뭔가를 올리는 등 집에서도 계속 타이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손가락이 아픈 건 나에게 치명적인 일이었고 고쳐야만 했다.




  


     작년 겨울, 발가락 뼈가 부러지는 바람에 다녔던 회사 근처 정형외과에 들렀다. 의사 선생님이 뭣 때문에 왔냐고 묻길래 손가락 끝이 찌릿찌릿해서 불편하다고 했다. 일단 엑스레이를 찍어보자고 한다. 역시나 엑스레이 상 특별한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라 한다. 이번엔 팔목과 손가락까지 한꺼번에 연결되는 부목을 받았다.


     그리고 체외충격파 치료와 파라핀 치료를 받고 가라고 했다. 체외충격파 치료는 지난번에 발가락 다쳤을 때 해봐서 뭔지 알고 있었는데 파라핀 치료라는 것은 처음 들었다. 검색해보니 촛농을 녹인 것을 통증 부위에 몇 차례 덮어 씌워주는 것인데 통증 완화에 효과가 있다고 했다.


     물리 치료실로 이동했다. 파라핀 치료를 받아본 적이 있는지 묻기에 처음이라고 했더니 설명을 해주었다. 촛농이 잔뜩 녹여져 있는 통에(보기에는 그냥 물이 담긴 것처럼 생겼다) 손등까지 3초 정도 담그고 뺀다. 손을 담갔다 빼고 나니 손이 기계에 들어갔던 부분에 하얗고 얇은 막이 생겨있었다. 그리고 공기 중에서 10초를 세고 말린 다음 다시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이걸 총 5번 하는데 이 5회가 1세트고, 1세트를 하고 나면 얇았던 촛농 막이 두꺼워진다. 5회가 끝나고 나서는 어느 정도 공기 중에서 말린 다음에 살살 벗겨내면 된다. 그리고 같은 동작을 처음부터 다시 2세트 반복한다.


파라핀 치료를 받으면 생기는 얇은 막의 하얀 장갑.


     겉보기엔 물처럼 생겼는데 촛농을 녹인 것이라 그런지 손을 넣자마자 '앗, 뜨거워!' 하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뜨거웠다. 다행히 손을 3초만 넣었다 빼면 돼서 참을 수 있었다. 손을 담갔다 빼는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촛농이 굳어져서 만든 얇은 막 또한 점점 두꺼워지면서 흡사 하얀 장갑을 낀 것처럼 된다. 계속 바라보고 있자니 굳어진 하얀색 촛농이 크리스피 크림 도넛의 오리지널 도넛을 감싸고 있는 설탕 덩어리 색깔과 똑같다. 아, 크리스피 오리지널 도넛 오랜만에 먹고 싶네.


     간단한 동작이지만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넣었다 뺐다 하면 몇 번 했는지 헷갈리기 때문에 숫자를 잘 세야 했다. 처음엔 손을 넣고 하나, 둘, 셋. 그리고 손을 빼서 10초를 기다리며 다시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을 센다. 다시 반복. 숫자를 처음 배웠던 어릴 적을 떠올리며 조심스레 숫자를 센다. 그런데 워낙 단조로운 작업인지라 지루해졌다. 그러다 보니 내가 여태 몇 세트를 했는지 자꾸 놓쳤다.


     그러다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나는 지금 숫자를 최대 열(10)까지 세야 한다. 그러면 내가 10까지 셀 수 있는 외국어는 뭐가 있지? 영어와 일본어 그리고 초급이긴 하지만 중국어와 프랑스어도 숫자 10까지 세는 건 가능하다.



좋았어,
지금부터는 내가 공부하는 언어로 돌아가면서 숫자를 세보는 거야!




먼저 우리말로 숫자를 센다.

기계에 손을 넣고 하나, 둘, 셋.

그리고 손을 치료기 밖으로 꺼낸다.

다시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두 번째는 영어로 숫자를 센다.

기계에 손을 넣고 One, Two, Three를 속으로 외친 후 손을 꺼낸다.

그리고 One, Two, Three, Four, Five, Six, Seven, Eight, Nine, Ten.


자, 다음은 프랑스어로 가볼까?

기계에 손을 넣고 Un, Deux, Trois.

손을 꺼낸 뒤 Un, Deux, Trois, Quatre, Cinq, Six, Sept, Huit, Neuf, Dix.


다음은 일본어로.

일본어는 중국어와 똑같이 한자로 표기하지만 발음이 다르다.

손을 넣고,

一(いち)[ichi]、二(に)[ni]、三(さん)[san]。

손을 꺼낸 뒤,

一(いち)[ichi]、二(に)[ni]、三(さん)[san]、四(し)[shi]、五(ご)[go]、六(ろく)[roku]、七(しち)[shichi]、八(はち)[hachi]、九(きゅう)[kyu]、十(じゅう)[jyu]。


마지막으로 중국어. 중국어는 성조가 있지만 발음만 표시했다.

손을 넣고,

一(yi),二(er),三(san)。

다시 손을 꺼내고,

一(yi),二(er),三(san),四(si),五(wu),六(liu),七(qi),八(ba),九(jiu),十(shi)。



     이렇게 하니 한 세트가 자연스럽게 끝났다. 그런데 희한한 건 한국어 다음에 영어를 하면 프랑스어가 따라오고, (반대도 마찬가지) 일본어를 하면 중국어가 따라온다. 중국어를 먼저 말하면 그다음에 영어나 프랑스어가 아닌 일본어가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다.


     영어-프랑스어는 같은 어군이라 그런 건가? 생각했는데 굳이 따지자면 영어는 게르만어군, 프랑스어는 로망스어군으로 같은 어군은 아니라 한다. 하지만 두 언어 모두 알파벳으로 표기하고 비슷한 단어들도 있어서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그리고 일본어-중국어의 경우는 두 나라 모두 한자 문화권이다 보니 기본적으로 한자 표기를 하기에 같은 한자를 쓰거나 발음이 비슷한 단어가 많다. 그러다 보니 공부를 할 때도 프랑스어 단어를 보다 보면 영어 단어가 생각이 나고, 중국어 단어를 보다 보면 일본어 단어가 떠오르곤 한다.


     아무튼 4개 국어를 공부 중인 걸 이럴 때 써먹을 생각을 한 스스로에게 뿌듯했다. 이런 나에게 엄마는 가끔 묻는다.



너는 그렇게 언어 공부해서 어디다 쓸려고 그러니?
요즘은 인공지능이나 컴퓨터가 다 통번역 한다는데?


     맞다. 내가 무슨 언어학자나 번역가가 되려고 외국어 공부를 하는 것은 아니다. 이건 내 흥미와 욕심에 연결되어 있는 문제다. 나에겐 노래나 문학작품 등을 원래 그 나라의 언어로 읽음으로써 번역자를 거치지 않고 그 뜻을 내가 직접 온전히 느끼고 싶다는 이상하고도 무모한 욕심이 있다. 나는 이 마음이 남들보다 강하고, 인생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즐거움 중 하나가 바로 이 부분이기 때문에 외국어 공부를 즐겨하고 있다.


     번역 앱이 난무하는 세상에 무려 4개나 되는 낯선 외국어를 우직하게 공부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 시간에 부동산 임장을 다니는 게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실생활에서 숫자 세기를 할 때, 그동안 공부해온 언어로 한 바퀴를 돌 수 있다는 건 재밌는 일이 아닐까? 인생을 살면서 이런 엉뚱한 재미도 있어야지 않을까. 남들은 모르고 나만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재미, 외국어를 내뱉는 동안만큼은 한국이 아닌 그 나라에 가있는 듯한 느낌. 나는 이 재미를 늘리기 위해 앞으로 2,3개의 언어를 더 공부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야말로 24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지만, 내가 만날 낯설고 새로운 언어의 세계가 너무 기대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배우는 모든 언어로 해리포터 시리즈 읽어보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