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니seny Feb 25. 2022

독립 후 혼자 맞이하는 크리스마스 (상)

평소와 다름없이 청소를 하고 눈물, 콧물 쏟으며 책을 읽었다

     크리스마스에는 꼭 특별한 일을 해야만 할 것 같다. 따지고 보면 1년 365일, 매일매일 해가 뜨고 지고, 달이 뜨고 지고, 바람이 불었다 비가 왔다 눈이 왔다 하는 똑같은 날들인데 꼭 그런 날들이 있다. 평상시와 똑같이 보내면 안 될 것 같은 날들. 너무 무리하지만 않는다면 그런 날들을 특별하게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 김에 추억도 만들고 말이다.


     20대 때는 크리스마스에 약속이 없으면 약속을 만들었다. 그때는 같은 처지인 솔로인 친구들이 많이 있었고 애인이 있으면 꼭 크리스마스 당일이 아니더라도 그즈음 해서 만나곤 했었다. 이제는 다들 가정을 이뤘고 웬만한 것들을 다 경험해보고 사회에 찌든 우리 아니 나 같은 30대들은 이제 모든 일이 심드렁하게 느껴져서 그런지 크리스마스라고 해서 특별한 걸 기대하진 않는다. 이런저런 이유로 최근 몇 년간은 크리스마스는 조용하게 보내고 있다. 오히려 이제는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아쉽게도 토요일이었다. 나는 종교가 없으므로 크리스마스는 나에게 공식적으로 쉴 수 있는 휴일이다. 크리스마스는 대체 공휴일도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주말과 겹친다면 그 해 공휴일은 하루가 줄어드는 것이 되고 바로 올해가 그런 해였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차라리 토요일에 겹친 게 괜찮은 것 같기도 하다. 만약 평일이었다면 혼자 보내는 첫 크리스마스인데 좀 더 외로웠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독립한 이후, 매주 토요일 일어나서 가장 먼저 행하는 일과는 바로 집안 청소다. 오늘이 크리스마스라고 해서 청소를 안 할 순 없었으므로-어차피 오늘이 아니어도 언젠가는 해야 하기에-오늘도 청소로 토요일을 시작했다. 날이 갑자기 추워졌지만 그래도 창문을 조금씩 열어놓고 화장실 청소를 먼저 끝내고 침대방과 거실과 서재방을 닦고 물티슈로 먼지를 훔쳐낸다. 요즘 로봇 청소기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져서 조만간 구매할지도 모르겠다. 물걸레 기능까지 붙어있는 걸로 사고 싶은데 그러면 가격대가 너무 뛰어서 고민 중이다.


     청소를 끝내고 나면 마음이 충만해진다. (관련 글 링크 : https://brunch.co.kr/@lifewanderer/176) 이건 혼자 살기 전에는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다. 청소를 마치고 나면 '자, 이제 뭐든 해볼까?'라는 생각과 함께 한편으론 '뭐든 해도 되겠지'라는 생각도 든다. 오늘은 크리스마스니까 미리 예약해뒀던 전화영어 수업을 취소했다. 나는 가능하면 매주 수, 토에 전화영어 수업을 하고 있는데 그래도 오늘은 크리스마스니까, 오늘까지 수업을 하고 싶진 않았다. 고작 20분짜리 전화영어 수업을 취소하고 나니 수업을 앞두고 긴장하고 있던 마음이 풀어져서 인지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잘했다.


     이제 나만의 시간이다. 내일까지 도서관에 갖다 줘야 하는 책들도 있고 해서 책을 읽기로 했다. 유튜브에서 book cafe music을 틀어놓았는데 너무나 내 취향이었다. 오늘 읽어야 할 책들도 대부분 거의 다 읽어서 몇 장 안 남은 상태였기 때문에 책 읽는데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처음으로 혼자서 맞는 크리스마스 오후를 함께한 책, <Me Before You>. (@집, 2021.12.25)


    도리스 레싱의 <풀잎은 노래한다>, 김아영의 <미국 영어 문화 수업>를 읽고 나서야 오늘 읽을 마지막 책을 집어 들었다. 지난달부터 영어 원서 읽기 독서모임에 가입해서 읽기 시작했던 <Me Before You>다. 이것도 이제 마지막 2 챕터 정도 남았다. 독서모임은 한 달로 끝났지만 나는 독서모임과 상관없이 이 책을 끝까지 읽기로 했기 때문에 이제 그 대단원의 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Me Before You>는 이미 한 번 읽었던 책이다. 영화를 먼저 봤었는데, 꽤 감동적이어서(여자 주인공 루이자 역을 맡은 에밀리아 클라크가 사랑스럽기도 했고) 찾다 보니 원작으로 책이 있다고 했다. 영어 공부도 할 겸 원서를 샀다. 줄거리는 좀 뻔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인생에 지쳐있는 나에게 용기를 주는 책이다. 그래서 요즘 지쳐있는 나에게 힘을 주고자 다시 읽어보기로 한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26살인 루이자 클라크Louisa Clark(일명 루Lou)이다. 그녀는 부모님과 할아버지 그리고 여동생과 여동생의 아이와 함께 집에서 살고 있으며 꽤 오랜 기간 사귄 남자친구 패트릭이 있다. 영국의 작은 소도시 마을에 살고 있으며 그곳에 있는 카페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있는데 그녀는 카페 일을 매우 사랑하고 그녀의 성격과 적성에도 잘 맞는다. 그런데 갑자기 카페 사장이 고향인 호주로 돌아가게 되면서 카페를 닫게 되고 그녀는 졸지에 실업자가 된다. 특별한 기술이 없는 루는 고용센터에 다니며 여러 직업을 전전하지만 오래 다니지 못한다. 그러다 집에서도 가깝고, 시급도 꽤나 센 그리고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 일을 발견하게 되어 출근하게 된다.


     그 일이란 다름 아닌 사지 마비 환자인 35살의 윌 트레이너Will Traynor(윌Will)를 돌보는 일이다. 간단한 처치와 말동무 정도의 일만 하면 되는 아주 쉬운 일이라고 했다. 천성적으로 밝고 명랑한 루는 윌에게 말도 걸어보고 노력해보지만 돌아오는 건 비꼼과 차가운 냉소뿐이다. 그래도 지금 아버지의 일자리도 위태위태하고 동생 트리나도 대학으로 공부를 하러 가게 되면서 루가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일을 그만둘 수도 없다. 하는 수 없이 일을 다니며 하루하루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하필이면 오늘 읽은 26장이, 디그니타스(존엄사를 하는 장소)로 향한 윌을 만나러 가는 장면이 나오는 부분이었다. 루와 온라인 사지마비 환자 모임에서 만난 친구인 리치와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부터 눈물이 주룩주룩 흐르기 시작한다. 루가 스위스에 왔다고 하자 리치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 나는 휴지로 눈물을 닦고 코를 푼다. 그러던 도중에 각티슈가 비었다는 걸 발견했는데 다행히 며칠 전 각티슈가 많이 빈 것 같아 그 옆에 새 각티슈를 갖다 놨었다. 이럴 줄 알고 미리 갖다 놓은 건가?


I stared out the window at the bright-blue Swiss sky and I told him a story of two people.

Two people who shouldn't have met, and who didn't like each other much when they did, but who found they were the only two people in the world who could possibly have understood each other. And I told him of the adventures they had, the places they had gone, and the things they had seen that they had never expected so. 

<Me Before You>, Jojo Moyes, p.398

(이것은 루가 윌에게 들려주는 두 사람의 이야기이다.)


     병실에서 만난 윌이 루와 둘이 대화하고 싶다고 해서 둘만 남게 되었다. 윌이 루에게 뭔가 재밌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자 그에 화답해 루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정확한 주어가 없고 모르는 사람이 이야기만 들으면 마치 동화나 소설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겠지만 그건 둘의 이야기였다. 이 소설을 읽은 독자들이라면 알 수 있는 것이었기에 나는 또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은 눈앞에 살아있는 윌을 만지고 느끼고 있지만 한편으론 벌써 그가 내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 이미 가있는 것만 같다고 느끼는 루. 눈물, 콧물을 쏟아내면서 둘의 영원한 헤어짐을 함께 했다.



'독립 후 혼자 맞이하는 크리스마스 (하)'로 이어집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초보 독립생활자가 부딪치는 장벽 : 청소가 뭐예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