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회사에선 마주칠 수 없었던 사람들과, 같은 회의실에 앉아 일하다
'내가 다녔던 첫 회사의 고객사가 되다 (상)'에서 이어집니다.
짧은 중간감사를 마치고 연말을 지나 연초에 기말감사가 진행되었다. 팀장님은 이번부터 본인 대신 나와 팀에서 같이 일하는 나와 연차가 같은 동료가 감사 과정에서 회계사분들의 요구에 대응하고 또 적극적으로 참여하길 바라셨다. 그래서 나도 혼자서 업무 관련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고 답변은 그럭저럭 무난하게 마무리했다.
회계감사는 보통 며칠간에 걸쳐 진행되기에 큰 회의실 하나를 아예 빌려놓고 감사 기간 동안 회계사들도 아예 우리 회사로 출근을 한다. 그래서 항상 회계 감사를 할 때는 회사에 하나밖에 없는 가장 크고 좋은 회의실을 예약해놓곤 했다. 보통 회계사들이 3,4분 오시는 데다 중간중간 우리도 들어가서 인터뷰를 하거나 이야기를 해야 할 때도 있어서 작은 규모의 회의실은 적당치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감사기간 중 어느 날 오후에 정말 짧게 십여분 정도 회사 행사가 있는데 그 회의실을 써야 하니 자리를 비워달라는 통보를 들었다. 심지어 그 행사는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것이라 사실 장소는 크게 상관이 없는데도 말이다. 어쩌겠는가. 까라면 까야지. 그래서 그 10분을 위해 회의실을 비웠다 나갔다 하는 소동을 벌이지 않기 위해 오후에 쓸 다른 장소를 찾아야 했다.
감사 기간 중엔 우리 팀원들도 왔다 갔다 해야 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어서 외부 장소를 빌리는 것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다행히 발이 넓은 우리 팀장님 덕에 같은 건물 내에 있는 다른 계열사의 회의실을 빌릴 수 있었다. 오후가 되어 회의실을 옮기려는데 팀장님이 나보고 같이 올라가자고 하신다. 계열사이긴 해도 교류가 거의 없어서 다른 계열사의 사무실에는 처음 올라가 보는데 우리 사무실보다 조명이 밝고 널찍해 보여 부러웠다.
우리가 들어간 회의실도 수리를 한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는 몰라도 꽤 깔끔했다. 그런데 노트북을 세팅하려고 하니 전기가 안 들어온다. 아마 수리를 하고 회의실을 거의 처음 쓰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동안은 전기를 쓰지 않았거나. 그래서 다른 직원분이 와서 전기 배선 상태를 봐주고 나서야 회의실에 자리를 세팅하고 앉을 수 있었다. 서로 불편할 수도 있는 관계인 감사인과 피감사인이 한 방에 앉아 있자니 긴장감이 돌기도 했고 중간중간 팀장님이 회계사들과 농담을 하면서 가라앉은 분위기를 끌어올리기도 했다.
그러다 회계사 중 한 명이 최근에 다른 대형 회계법인에 일이 있어서 다녀왔다며 사무실이 풍광도 좋고 아주 깔끔하다고 했다. 그러자 팀장님이 지금 계신 사무실도 좋지 않냐고 말을 덧붙였다. 팀장님이 말하는 그 사무실은 나도 근무했던 곳이기에 아는 곳이니까 괜히 어쭙잖게 끼어들어 한마디 하고 싶어졌다.
임원분들 방에 한해서이긴 하지만,
그쪽도 풍광이 꽤 좋을걸요?
내가 그 회사를 다닌 지 2년 정도 흘렀을 때, 회사가 이사를 했었고 당시로서는 신축 건물에 첫 입주를 했었다. 그렇지만 그로부터도 벌써 10년이 흘렀다. 당시엔 새 건물이었던 그 건물이, 이제는 아주 조금은 낡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자리에 앉아 업무를 했다. 그동안 회계사들과 잠깐씩 인터뷰는 한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같은 공간에 앉아서 일하기는 처음이었다. 물론 바로 옆에 있으니 나한테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는데 편하면서 불편하기도 했다. 옛 회사의 로고를 달고 있는 사람들과 한 때 그곳에 속해 있었던 내가, 같은 회사 소속으로 근무하는 동안 마주친 적도 없는 데다 업무 상 같은 회사에 근무한다고 해도 같이 일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그런 관계의 사람들과 이제는 같은 공간에서 일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그들이 말하는 ‘비자격자’의 신분이지만 그래도 내 업무에 대해 설명을 할 수 있고 설명도 하고 있다. 10년 전에 그곳을 퇴사할 때는 이런 장면을 상상이나 했을까? 회계법인에 다닐 때는 관리부서가 모여있는 층과 회계사들이 주로 사용하는 층도 달라서 1:1로 만난 적도 없고 직접 얘기를 나눠본 적도 거의 없었다. 끽해야 경비정산하다 이상한 게 있으면 연락하는 정도. 그런데 오히려 퇴사를 하고 나오니 그들과 더 많이 마주치고 이야기를 나누고 같은 공간에서 업무를 보는 현실이 아이러니했다.
첫 회사를 박차고 나오면서는 회계일 진짜 하기 싫다고, 꼭 다른 일 찾아야지 하다가 결국 다른 일을 찾지 못하고 다시 이 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10년 안에는 꼭 그만두고 다른 업무로 떠나가리 했는데 아직까지도 이 일을 하고 있으며 팀장님의 배려인지 떠밀림인지 몰라도 같은 회의실에 앉아 업무를 보는 풍경을 연출하게 되었다.
타닥타닥.
타타타타타타닥.
모두 일하느라 바빠서 둔탁한 키보드 소리만 울려 퍼지는 계열사 회의실에 앉아서 이런 생각을 했다. 옛 회사의 로고를 단 사람들과 함께 일해보는 것까지 했으면 이제 이 일은 좀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이것은 모든 일에 퇴사할 이유를 갖다 붙이는, 일하기 싫은 자의 투정이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연마감과 기말감사 때문에 며칠 내내 야근하고 계속 숫자를 들여다보고 자료를 만드느라 스트레스를 받고 피곤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두근두근하고 상기된 마음으로 그날 오후를 흘려보냈다는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