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울타리 너머에서 과거에 내가 일했던 곳의 로고를 마주했을 때
나의 첫 번째 직장은 회계법인의 재경부였다. 보통 사람들은 회계법인이라고 하면 회계사들만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곳도 '회사'이기 때문에 재경, 총무, 인사 같이 모든 회사에 있을 법한 부서들도 있고 그 외에 회계법인에만 존재하는 특수한 부서들도 있다. 물론 직원 비중은 회계사나 컨설턴트들의 수가 절대다수긴 하다. 회계법인의 재경부는 회계법인이라는 회사의 매출을 집계하고 비용을 관리하는 업무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부서에 회계사들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회계법인의 재경부라는 특수성 때문에 일반 회사라면 시행해야 할 감사는 받지 않았고 대신 내부적인 감사 절차만 있었다. 그 뒤로 이직하면서 일반 회사의 회계팀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회계 감사를 받아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내가 다니는 회사를 감사하는 회계법인이 꼭 내가 전에 다니던 회계법인이 되란 법은 없었지만 업계 특성상 한 번쯤은 첫 회사의 로고와 마주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퇴사한 지 벌써 1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는 이상하게 요리조리 잘 피해 다녔는데 이번에 감사인이 바뀌면서 첫 회사의 로고를 마주하게 되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곳은 법인의 재직 인원수가 천명을 넘어가는 데다 여러 계열사도 있고 전문직과 일반직 직원들 사이의 구분이 지어져 있는터라 같은 법인에서 근무했다고 해도 누가 누군지 거의 모른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내가 회계 업무를 하는 이상 반드시 나의 현 회사가 내가 다녔던 첫 회사의 고객이 될 수 있는 확률이 있었는데 그게 10년이 지나서 실현된 것이다.
우리 회사에 감사를 나오는 회계사들에게 굳이 내가 과거에 그곳에 다녔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내가 같은 법인에서 근무했단 사실을 알 수 없다. 내가 다녔던 회계법인은 소위 업계에서 말하는 BIG4 중 한 군데여서 직원수가 많은 데다 사람들이 새로 들어오고 나가는 일도 잦아서 인사발령이 거의 매일 나는 곳이다. 또 내가 그곳을 퇴사한 지 10년이 지났으니 오히려 staff 직급이나 manager 직급인 사람이 예전의 나보다 늦게 입사한 사람들일 테니 당연히 서로를 알 수 없다.
그런데 이번에 우리 회사를 담당하는 파트너(임원)분의 성씨가 나만큼이나 특이한 분이었다. 아니, 나보다 특이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분만큼은 이름을 보는 순간 알았다. 분명히 낯이 익은, 아는 이름이었다. 기억나. 내가 경비 정산을 맡았던 부서에 근무했던 사람이었다. 얼굴은 모르지만 내가 있을 때부터 다녔던 분이었고 그분은 계속 그곳에 남아 이제는 임원이 된 것이었다.
신기했다. 돌고 돌아 결국 나는(정확히는 현재 내가 다니는 회사가 그 대상이지만) 과거에 내가 다녔던 회사의 고객이 되었다. 옛 회사의 로고가 선명히 박힌 상대방의 명함을 받으며 생각했다. 로고 디자인이 살짝 바뀌었네? 사무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테지만 나와 같이 일하던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없거나 아주 소수만 남았을지도 모르겠구나.
어쩌다 보니 점심시간에 팀장님과 나 그리고 그쪽에서 온 두 분과 함께 점심을 먹게 되었다. 혹시 그쪽에는 코로나 걸린 분들은 안 계시냐고 팀장님이 물어보니 자격자(회계사를 일컫는 듯)뿐만 아니라 비자격자들도 합해서 법인의 인원이 1500명은 된다면서 그중에 두 명이 코로나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구나. 나는 '비자격자'인 직원이었구나. 회계사 자격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각각 자격자와 비자격자라는 명칭으로 부르고 있었구나. 이건 같은 회사에 근무했을 때도 몰랐던 사실이었는데 기분이 이상했다.(10년 사이에 용어가 바뀐 걸까?) 자격이 있고 없음을 나타내는 객관적 사실을 나타내는 단어이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건 내가 '자격자'가 아니기 때문에 느끼는 자격지심인 걸까?
내가 그곳에 다녔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래 봤자 급여 명세서에 찍히는 회사 이름이 같은 곳에 '다녔다' 뿐이지, 업무 상 연관되거나 같은 시기에 근무를 했던 것도 아니니까. 같은 시기에 근무했다 해도 근무하는 층도 다르고 매일 사무실로 출근하는 나와 달리 회계사들은 고객사로 바로 출근하는 경우가 훨씬 많아서 사무실에서 마주치는 일 자체도 드무니까. 아마 같은 회사에서 월급을 받았다는 점 빼고는 공통점을 찾을래야 찾을 수도 없을 거다.
연중에 1회 있는 중간감사는 그렇게 마무리되었고 기말감사가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다녔던 첫 회사의 고객사가 되다 (하)' 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