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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니seny Aug 13. 2022

집에 못 들어올 뻔했다

분리수거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 생긴 일

제목 그대로다.

멀쩡한 집을 놔두고 집에 못 들어올 뻔했다.






사건 개요는 다음과 같다.



3월 중순의 어느 느지막한 일요일 저녁.

낮잠을 자다가 일어나서 저녁을 먹고 집안일을 조금 하기로 한다.
저녁을 간단히 먹고 주말 내내 미뤄뒀던 설거지를 싹 치우고 음식물 쓰레기 망도 비운다.


     자, 이제 쓰레기를 버리는 일만 남았다. 나는 혼자 사는 데다 배달음식도 많이 시켜먹지 않기 때문에 분리수거 쓰레기가 많이 나오는 편은 아니라 주 1회, 그것도 주로 주말에만 버린다. 항상 일요일쯤 되면 쓰레기가 적당히 박스 한 개 분량 정도를 넘지 않게 쌓여있다. 밀봉한 음식물 쓰레기를 분리수거용 종이박스에 같이 넣고 집을 나선다.


참고로 지금 현재 나의 차림은 이렇다.


완전 잠옷은 아니지만 위아래 모두 집에서 입는 편안한 옷을 입고 있다.
낡고 헤졌다.
바지는 발목까지 내려오지만 윗도리는 7부 정도로 살짝 짧고 두꺼운 소재는 아니다.
두껍냐 얇냐를 굳이 따지자면 얇은 쪽이다.

머리는 수요일 이후로 감지 않아서 떡지고 냄새가 나는 상태. (너무 적나라한가?ㅎ)
하지만 곧 쓰레기를 버리고 와서 깨끗이 씻을 거니까 모자를 써서 잠시만 가리기로 한다.

양말 신고 운동화를 신기가 귀찮아 그냥 맨발에 슬리퍼를 턱 걸쳐 신는다. 
그리고 시국이 시국이니 만큼 마스크도 잊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아까 설거지를 할 때 물이 튀니까 앞치마를 한 상태였는데
설거지는 끝났지만 아직 쓰레기를 버리는 것까지 해야 부엌일이 끝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어서
앞치마를 벗지 않고 그대로 입고 있었다. 


     그리고 문 밖으로 나선다. 문이 닫히면서 띠리링, 하는 소리와 함께 도어록이 잠긴다. 아, 그런데 이때 머릿속을 스치는 한 줄기 생각. 문이 잠기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갑자기 도어록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았다. 


     전에도 이런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래도 가족들이랑 살 때는 집에 반드시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에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으면 벨을 누르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예-전에 열쇠를 가지고 다니던 시절에도 나는 절대로 열쇠를 두고 다닌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열쇠로 인해 곤란을 겪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독립을 하게 되고 나서 쓰레기를 버리러 나갈 때마다 나가기 직전에 '아 맞다, 도어록 비밀번호 뭐였지?'란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었다. 그래서 그때도 오늘과 똑같이 거지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비밀번호가 적힌 핸드폰을 챙겨서 들고나갔었다. 그렇지만 핸드폰을 챙긴 것이 무색하게도 비밀번호는 잘만 생각났고 아무 문제없이 집에 들어왔었다.


     오늘은 아까 설거지를 미뤄뒀다 보니 양이 꽤 돼서 유튜브를 보면서 설거지를 하려고 싱크대 앞 선반에 핸드폰을 올려둔 데다가 일부러 영상 길이가 긴 걸 선택했더니 설거지가 다 끝났는데도 영상이 아직 끝나지 않아서 그대로 틀어져 있는 상태였다. 아마 영상이 다 끝난 상태였다면 나는 과연 핸드폰을 챙겼을까? 하지만 영상이 끝나지 않았고 나는 금방 갔다 올 거니까, 하며 핸드폰을 챙기지 않고 그대로 문을 닫아버렸던 것이다.


     쓰레기를 버리고 집 앞으로 돌아왔는데 머릿속이 새하얗다. 그동안 걱정했던 그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10년 이상을 써온 도어록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는다.



     하... 8자리 숫자라는 것과 제일 처음 시작하는 숫자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망했다. 지금 쓰는 도어록 비밀번호는 안전성으로는 최강인 게, 그냥 아무 숫자나 막 조합해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보안은 최강이었지만 처음에 외울 때도 시간이 많이 걸렸었다.


     한동안은 열심히 외우다가 아무래도 계속 쓰다 보니 나중엔 번호 자체보다 그냥 패턴 인식하는 것처럼 패턴을 외워버린 것 같다. 그래서 가끔 이렇게 번호가 기억나지 않거나 아예 그 패턴이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있었다. 여태까지 그럴 때 아무 문제도 없었던 건 반드시 핸드폰을 가지고 있었고 핸드폰 메모장에 그걸 적어놨기 때문이다. 혹은 핸드폰이 없었더라도 집 안에 반드시 누군가가 있어서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핸드폰마저 두고 나왔다. 나와 집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저 두꺼운 철문 안에서 아까 틀어놓은 유튜브 영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을 테니 핸드폰은 혼자서도 영상을 재생하며 잘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비록 소리는 들리진 않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숫자를 조합해 눌러봤지만 실패.

실패....

또 실패....



     몇 번 이상 실패하면 잠길거 같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다섯 번을 실패하니 뭐라 뭐라 음성이 나오더니 화면이 바뀌어버렸다. 그래도 다행인 건 3분간만 잠겼다. 그래서 그 시간 동안 여러 번호들을 조합하며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시도하기를 한 세트 (다섯 번) 
또 실패하고 3분 휴식

두 번째 세트 (다섯 번)
또 실패하고 3분 휴식

세 번째 세트 (다섯 번)
또 실패하고....



     몇 번을 반복했는지 모르겠다. 왜 도어록 비밀번호를 굳이 8자리로 설정한 걸까? 4자리로 해도 되는데. 원래 이 비밀번호 전에 가족들이 쓰던 비밀번호가 있었고 그건 가족들 모두가 알고 있는 연도와 날짜라서 외우기가 아주 쉬웠다. 


      그런데 어느 날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니 동생이 밖에 수상한 사람이 있다나 뭐라나 하면서 마음대로 아무 의미 없는 숫자를 조합해서는 가족들의 동의 없이 도어록 비밀번호를 바꿔버렸다. 심지어 지금은 같이 살지도 않고 저 멀리 미국에 살고 있는 동생이 떠오르며 그녀가 미워지려고까지 했다.


     다행히 3분간만 락이 걸리고 풀리니까 시도는 계속해 볼 수 있었지만 그것도 내가 비밀번호를 정확하게 맞춰야 풀리는 거지, 계속 이런 식이면 소용이 없었다. 8자리 중에 앞 4자리 따로, 뒷 4자리가 짝으로 맞춰져 있는데 도대체 내가 떠올린 숫자들이 앞 4자리, 뒤 4자리가 아니 그 둘 중에 맞는 게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래서 작전을 바꿔 아무 번호나 막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 생각난 것들을 줄을 세운 다음에 하나씩 소거해나가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예를 들면

12345678* (땡)
12356878* (땡)
...

이런 식으로.


     그런데 이것도 분명 내가 맞는 숫자라고 생각했는데 계속 틀렸다. 소거법을 몇 번이나 시도했으나 이제 계속 같은 번호만 맴돌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틀린 건지 모르겠다. 아까 분명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을 때는 아직 해가 떠 있었는데 어느새 밖이 어둑어둑 해졌다.


     아까 사실 처음에 실패했을 때부터 든 생각이 하나 있었다. 오늘은 주말이라 관리사무소는 직원이 없을 것이고 그나마 사람이 있을만한데가 경비실인데 겉옷도 제대로 안 챙겨 입고 나온 데다 양말도 없어서 여기서 먼 경비실까지 걸어가기도 애매하다. 그래서 현관 입구에서 호출 전화를 걸면 경비실로 연결되는데 거기다 전화를 해서 엄마와 아빠의 핸드폰 번호 두 개를 알려주고 '어디 아파트 몇 동 몇 호에 따님 사시죠? 집에 들어가는 번호를 몰라서 문 앞에 서있다고 하네요'라고 전달 좀 해달라고 해야 하나.


     그럼 부모님은 본가에서 차를 끌고 이 집에 와서 문만 열어주고 가야 하는지 아니면 경비아저씨한테 부모님이 현관 비밀번호를 불러주면 그걸 다시 나한테 전달해서 내가 문을 열어야 하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건 정말 최후에 쓸 방법이었다. 후자는 비밀번호가 경비한테 노출되는 거니까 불안해서 당장 바꿔야 한다. 그렇다고 부모님에게 차를 끌고 이 일요일 저녁 시간에 오라는 건 오버 같기도 하고. 그보다 평소에 부모님은 저녁을 일찍 먹고 일찍 주무시는 편이라 7시가 넘은 지금 시각엔 주무시고 계실 때가 많았다. 


     아까 내가 나오기 전에 거의 일곱 시쯤이었고 거기서 최소 30분은 흘렀을 테니 일곱 시 반이나 여덟 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평소 같으면 부모님 두 분 다 저녁 일찍 드시고 잠들어 있을 시간이다. 그러면 핸드폰으로 아무리 전화를 해도 안 받을 수도 있다.


      미치겠는 가운데 몇 번 더 시도한다. 이제 앞 4자리는 헷갈리지만 분명 뒷 4자리는 맡는 거 같았다. 앞 4자리만 잘 떠올리면 되는데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 


     이제라도 안되면 차라리 부모님한테 전화를 해서 문을 열어주러 오시던 아니면 비밀번호를 들키더라도 경비를 통해 번호를 받는 방법밖에 없을 거 같았다. 내일이 월요일이라 출근해야 하는데 이 차림으로 회사에 갈 수도 없다. 아니, 그보다 이 초겨울 날씨에, 아무리 아파트 안이라고 해도 밖에서 어떻게 밤을 보내겠냐고.


     몇 번을 실패했는지 모르는 가운데 또 3분 락에 걸려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직 3월이다. 손도 점점 시려오고 발도 시려오는 거 같다. 집에 있을 때 수면양말 신고 있었는데 그거라도 신고 나올걸, 왜 그걸 굳이 벗었을까 하는 후회가 들었다. 


     언제까지 이 짓을 할 순 없었다. 분명 어느 시점엔가는 결단을 내려서 부모님께 연락을 해야만 했다. 오히려 더 늦어지면 부모님 두 분이 진짜로 잠들어서 전화를 안 받을 수도 있고 또 전화를 받더라도 부모님도 내일 아침에 일하러 나가야 하는데 내가 사는 곳까지 왔다 갔다 하는 시간도 들 테니까 말이다.


     나는 번호가 떠오르지 않아서 패턴 인식하는 것처럼 손으로 열심히 패턴을 그리고 있었다. 뒷 4자리는 확실한 것 같아 앞 4자리만 잘 알아내면 될 것 같았다. 손으로 이렇게 저렇게 모양을 그리다 문득 한 번호가 떠올랐다. 여태까지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번호. 아마 모르긴 몰라도 여태 계속 같은 번호를 틀린 건데도 계속 시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느낌이 왔다.
만약 이것도 아니라면 이제는 창피를 무릅쓰고 경비실에 연락을 하기로 했다.

3분 락이 끝나고 번호를 눌렀다.
띠리링-
맑고 청아한 소리였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집에 돌아오니 아까 유튜브에 틀어놓고 나갔던 영상은 진작에 재생이 끝나서 핸드폰 액정은 까맣게 되어있었다. 보일러를 틀어놓은 바닥은 따뜻했다.


    시간을 보니 7시 47분이다. 정확히 몇 시에 나갔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모르긴 몰라도 30분 이상은 지난 게 분명하다. 중간에 락 걸린 횟수만 해도 최소 10번은 될 테니까. 안도감과 함께 핸드폰을 보니 불과 5분 전에 엄마한테서 온 카톡이 있다. 지금이라면 잠들지 않았을 거 같아 엄마한테 바로 전화를 걸었더니 받는다.


     엄마는 전혀 졸린 목소리가 아닌 멀쩡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아니, 엄마 평소엔 맨날 이 시간에 자거나 졸고 있잖아? 그랬더니 오늘은 일요일이라 평일처럼 피곤하지 않으니까 아직 안 잤다고 한다. 엄마를 붙잡고 방금 있었던 일을 떠든다.


     혼자 사는 건 참 쓸데없이 책임져야 할 일마저도 많아지는 느낌이다. 십 년 감수했다. 다음부터는 꼭 핸드폰 가지고 다녀야겠다. 나갈 때부터 머릿속을 스치는 불길한 그 한줄기 생각이 들었을 때, 그때 핸드폰을 챙겼다면 아무 문제없이 들어왔을 텐데. 그리고 이 사건의 효과가 불러온 파장이 다음날로 이어지고 마는데... 



다음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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