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 점심시간의 어느 대화

20대 초반 알바생의 넘쳐나는 시간이 부러운 직장인

by 세니seny

나는 요새 거의 도시락을 싸와서 혼자 밥을 먹기 때문에 점심시간에 사람들하고 대화를 하지 않는다. 도시락을 먹는 것의 장점이 훨씬 많지만 그래도 아싸인 내가 그나마 내가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게 점심시간이었는데 그 점은 좀 아쉽다.




나는 재무팀에 속해있고 재무팀은 다시 경영지원본부에 속해있다. 본부 안에는 다른 지원팀들도 있는데 본부 내 팀 간의 소통과 친밀도를 향상하기 위해 올해부터 한 달에 한번 본부 전체 회의를 하기로 했다. 오늘이 바로 그 본부 회의가 있는 날이다. 이 자리가 그다지 마음에 들진 않지만 조용히 자져 있으면 되니까 조용히 앉아 있는다. 어찌 회사에서 내 마음에 드는 일만 있을까.


이 회의에서는 약 20여 명이 되는 전 본부원 앞에서 매달 본인의 업무 실적이랄까, 한 달간 내가 뭘 했는지 발표해야 한다. 회계팀은 프로젝트성 업무가 있는 달도 있지만 안 그런 달이 훨씬 많다고요. 영업사원처럼 실적 그래프로 설명하기 어려운, 매월 반복되는 일의 연속이라고요.


그런데 다들 나와 같은 마음인지 이 회의에 크게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아서 오늘 회의가 있다는 걸 몰랐던 건지 각자 발표 자료를 만든 사람도 아닌 사람도 있어서 우왕좌왕했다. 결국 각 팀 팀장들이 대표로 발표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어 나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끝났다.


일부러 본부장님 하고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아서 딴짓을 했다. 소심한 반항이면 반항이랄까. 경영지원본부 안에는 여러 팀이 있는데 각 팀들끼리는 서로의 이해관계 때문에 친밀하지 않다. 친밀하기 어렵다. 그런데 본부장님은 같은 본부 안에 있는 직원들이니 약간씩 희생하면서 서로 친하게 지내길 바라신다.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하하, 호호, 하는 그런 관계.


그런데 같은 본부 안에서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마다 본부장님께서는 평화로운 해결책 일명 원칙은 지키지 않으면서 싸우지 않는 방법을 제시한다. 겉으로는 안 싸우고 끝난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오히려 각 팀에서 서운한 부분이 생긴다는 건 어떻게 봐야 할까? 차라리 대원칙에 의해 한쪽이 지는 것처럼 보여도 크게 보면 그게 맞을 것 같은데. 내가 본부장 정도의 직급이 되어보지 않아서 하는 속 편한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래서 뭔가 친해질 만한 활동을 하길 제안하셔서 회의가 끝난 뒤 여러 팀의 멤버가 섞어 조를 짜서 조별로 점심을 먹기로 했다. 그래서 회의가 끝날 때 즈음 이번 달도 밥 먹을 팀을 짜기로 했다. 나는 한 그룹에 사람이 너무 많으면 원래 취지가 옅어지는 것 같아 그룹당 3명을 제안했다.


그런데 요새 분위기 상 재택하는 사람도 팀마다 한두 명은 있고 외근이나 휴가로 시간이 안 되는 사람들도 있어서 그런 걸 감안해서 넉넉하게 4~5명으로 조를 나누기로 했다. 우리 조는 4명인데 우리 팀 막내사원이 오늘 재택근무라 사무실 인원이 3명밖에 없길래 인사팀에 온 알바생을 끼워 넷이 밥을 먹으러 갔다.


그런데 지난번부터 내가 자꾸 조장을 하고 있는 거다. 아무래도 나이 많은 사람을 조장시키라고 한 것 같다. 내가 나이로만 따지면 팀장 나이에 가까우니 일반 직원들 중에선 나이가 많은 편에 속한다. 그저 가볍게 밥 한 끼 먹으면서 편하게 대화를 나누자는 이 모임에 이런저런 강제성을 부여해서 불편해졌다. 그게 더 부자연스러워.


요즘 본부장님이 하는 것마다 마음에 안 들어서 큰일이다. 내가 맨날 그만둬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하고 있는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다. 그래도 오늘은 지난달 모임만큼 어색하진 않았다. 그렇지만 언제나 모임이 끝나고 나면 찾아오는 현타. 나 또 너무 쓸데없는 말 너무 많이 했나? 이것이 내향형 인간의 비애.


그러다가 다른 팀에 오는 알바생 이야기가 나왔다. 알바생인데도 불구하고 꽤 오래 다니는 거 같아 물어보니까 거의 1년 됐단다. 장기알바를 꾸준히 하는 사람 찾기 쉽지가 않은데 말이지.


전에 우리 팀에도 전표나 서류 정리만 하는 알바생을 세 달 정도 고용한 적이 있었다. 처음엔 일도 성실하게 하고 시간도 잘 지켜서 오더니 계약기간이 막바지이던 어느 날 연락이 안 되고 안 나오기 시작했다. 사무실에 갖다 놓은 사무실용 신발도 다 버려달라고 하면서 무단결근을 해서 진짜 어이없었다.


그에 비하면 이 알바생은 1년 내내 성실히 나오고 있으니 낫다. 그런데 이 알바생, 나이가 살짝 있어 보였는데 22살이란다. 취준생이라 그나마 알바를 오래 하고 있는 거 같았다. 우리 입장에서는 펑크 안 내고 성실하게 나와주니 고맙지만…


본부장님은 어린 학생이 경력에 아무 도움 안 되는 단순 알바만 하고 있으니 뭐라도 도움을 주고 싶으셨나 보다. 상황이 된다면 도와줄 수도 있으니 뭐라도 하고 싶은 건 없는지 물어보고 그 애의 의사를 물어보라고 했나 보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뭐가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고 했단다.


그래. 나도 그땐 그랬던 거 같다. 그런데 사실 그땐 아무거나 시도해도 웬만하면 다된다. 그게 젊음의 속성일까. 그녀가 부러워진다. 나는 지금 시간 없어 죽겠는데 그녀에게는 넘쳐나는 시간이 부럽다.


법정 근무시간인 주 40시간'만' 일하고 와도 집에 와서 씻고 저녁 해 먹고 치우고 나면 내 공부 등 개인적으로 쓸 수 있는 시간은 정말 2시간 정도? 많아야 3시간? 그런데 그것마저도 피곤해서 시간을 밀도 높게 쓰지 못한다. 3시간을 책상에 앉아 있어도 눈 깜빡하는 사이 졸고 있거나 책을 보고 있어도 집중 못하기 일쑤고 잠깐 잡은 스마트폰에 나머지 시간을 날린다.


아직 30대. 아직은 일할 나이.


아무리 주 35시간제를 외치고 그것을 소망하는 나일지라도 급여를 생각하면 다음번 이직은 정상적으로 주 40시간 근무를 하는 곳으로 가야겠지. 그래도 여전히,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싶다는 소망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1. 35시간 근무제 할래요 그리고 2년 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