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니seny Jan 13. 2023

10년 만에 바이올린을 다시 잡다 (상)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때의 기분


바이올린 학원에 등록했다.


     2022년 5월, 평소의 나의 행동패턴이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 나는 뭔가 새로운 걸 배우려면 그전에 그것에 대해 한참 찾아보고 나서야 최종적으로 결심을 하고 그다음에야 겨우 학원이나 강의를 등록하고 배우기 시작하는 편이다.


     나는 어렸을 때 바이올린을 배웠었고 또 대학교에서 2년간 동아리 활동으로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동아리 활동을 했었다. 이제 나는 일 년에 한 번, 얼굴도 이름도 잘 모르는 까마득한 후배들이 정기연주회가 있다며 해오는 연락을 받고 현금 찬조도 하는 졸업생 멤버로 남았다.   


     졸업생 모임의 활성화를 위해 졸업생들이 모여있는 단톡방이 하나 있다. 그 단톡방에 학교에 있는 재학생 후배들과 화석 같은 졸업생들 사이를 이어주고 있는 선배 언니가 재학생들 연습에 갔다 왔다면서 사진을 찍어 올렸다. 그 카톡을 보고 문득 바이올린 현(줄)을 사서 오랜만에 한 번 갈아볼까? 그리고 집에서 혼자서라도 활을 좀 움직여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도 혼자 사니까 해 볼 법한 생각이었다. 바이올린이나 현악기를 만져본 분들은 알겠지만 현악기는 집에서 연습하기에 좋은 악기는 아니다. 생각보다 소리 울림이 크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독립해서 혼자 살고 있으니 다른 가족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고 공동주택에 피해가 가는 시간만 아니라면 내 시간에 맞춰 언제든지 집에서 연습을 할 수 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현은 생각보다 비싸지 않았다. 대학생 때는 돈을 벌지 않았던 학생이라 그런지 이런 소모품마저도 꽤 비싸다고 느꼈나 보다. 나는 현을 갈고 튜닝도 할 줄 아니까 혼자서 해 볼 만했다.

 

     뭐든지 다 나오는 유튜브에 검색을 해보니 바이올린 현을 가는 방법에 대한 동영상도 많이 올라와 있었다. 이 기세를 몰아 출근을 앞둔 일요일 늦은 밤에 인터넷으로 주문을 해놓고 월요일에 출근을 했다. 한창 일하고 있는 월요일 오후, 쿠팡배송으로 집 앞에 배송이 완료되어서 퇴근길에 물건을 받아볼 수 있었다.


     줄이 오자마자 갈아야겠다 싶어서 바로 그날 저녁에 줄을 좀 갈아볼까 하고 몇 년 만에 악기 케이스를 열었는데 이미 끼워져 있는 줄을 튜닝하기도 힘들었다. 너무 오랫동안 연주를 안 해서 그런지 줄을 고정하고 있는 바이올린 위쪽의 검은 막대('팩'이라고 부른다)도 뻑뻑하고 계속 줄을 맞춰도 풀리기 일쑤였다.


     아마 한 5년 전쯤? 회사가 아직 여의도에 있던 시절, 나는 그전에도 여의도에 근무해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빨리 여의도의 새 회사에 적응을 마쳤다. 그러고 나니 이제 30대 초반을 맞이한 친구들은 하나둘씩 결혼이라는 제도 속으로 사라져 가면서 퇴근하고 만날 친구들이 없어졌다. 난 연애를 하지 않고 있어서 저녁 시간이 항상 남았다. 그러다 방구석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바이올린 케이스가 눈에 띄었다. 이참에 퇴근하고 바이올린 레슨이나 받아볼까?


      그때 마침 여의도에 성인전문 바이올린 레슨학원이 있었다. 마치 나를 위해 없던 학원이 생긴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학원 정보도 찾아보고 지출내역도 확인하면서 내가 레슨비를 감당할 수 있나 계산까지 했지만 부모님과 같이 사는 나는 내 돈 내고 바이올린을 배우러 다니는 것조차 눈치가 보였다.


    내가 번 내 월급을 쓰는 거지만 어쨌든 나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다른 집 자녀들은 결혼해서 부모님의 책임 하에서 벗어나 가정을 꾸리고 있는데 나만 결혼과 전혀 상관없는 취미활동을 하러 다니는 게 눈치가 보이는 거다. 이게 뭐라고. 그래서 결국 학원에 전화도 하지 못하고 마음을 접었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회사도 강남 쪽으로 이전하고 우리 집도 25년 만에 이사를 했으며 이제는 나도 독립을 했고 여전히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라 가족 구성원을 위한 의무도, 책임감도 없었다. 그래서 바로 학원을 검색해 봤다. 강남 쪽에도 그 학원의 지점이 있었다. 회사에서도 가기 괜찮은 위치였고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는 버스도 한 번에 있어서 매우 좋았다.


     몇 년 전에 비해 레슨비는 살짝 오른 거 같았지만 이제는 나도 승진했고 급여가 올랐다. 그리고 지금은 예전처럼 예산에 맞춰 적금을 넣고 남은 돈을 가지고 생활하지 않는다. 지금도 여전히 가계부를 쓰지만 예전보다 지출 통제가 느슨하다. 그래, 이번엔 정말로 레슨을 받아보자.


     바로 다음날 오후, 학원으로 전화를 했다. 학원에선 내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로 어느 요일이나 시간대에 레슨을 받고 싶냐고 물었고 나는 월요일 퇴근 이후나 토요일 오전을 선호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다행히 월요일 퇴근 후에 내가 원하는 시간에 자리가 있었다.



네,
그럼 그때로 등록해 주세요.



     마침 다음 주만 선생님이 월요일에 일이 있다고 해서 첫 수업을 이번주 토요일에 가기로 했다. 차라리 잘됐다. 수업 첫날엔 집에서 악기를 들고 바로 학원으로 가야 하는데 월요일부터 레슨을 하면 회사에 악기를 들고 가야 되고 그럼 다른 사람들도 다 볼 테니까. 안 그래도 팀장님이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업무 관련 교육 좀 들으라고 성화인데 그런 건 안 알아보고 취미생활 한답시고 바이올린 들고 다니는 것도 눈치가 보이는 나는 어쩔 수 없는 K-직장인이다.



'10년 만에 바이올린을 다시 잡다 (하)'로 이어집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2021년의 등산을 마치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