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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니seny Jan 13. 2023

10년 만에 바이올린을 다시 잡다 (하)

예술에서 삶의 태도 배우기

https://brunch.co.kr/@lifewanderer/269


'10년 만에 바이올린을 다시 잡다(상)'편에서 이어집니다.




      어느새 다가온 토요일. 전화로 상담할 때 예전에 배운 적이 있다고 했더니 쓰던 악기랑 교재를 가져오라고 했다. 일단 잘 몰라서 집에 있는 교재를 다 챙겼다.

    

     알고 보니 학원은 내가 가끔 버스를 타던 그 버스정류장 바로 앞에 있는 건물이었다. 세상 참 좁다. 학원에 들어가니 나 말고 나이가 살짝 있으신, 머리가 하얗게 센 남자분이 상담을 받고 있었다. 취미로 악기를 배우는 인구가 많이 늘어났구나 싶었다. 미리 기다리고 계시던 원장 선생님과 인사를 한 후 레슨비도 결제하고 학원 이용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을 들었다. 어렸을 적에 다니던 피아노 학원 생각이 났다.



학원에 들어서자마자 보였던 풍경. 학원 소유의 조금 비싼 악기들.


     시간이 돼서 레슨 선생님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외국에서도 공부하신 분이라는데, 나보다 어려 보였다. 이젠 어딜 가도 나보다 나이가 어린 선생님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나이는 어려도 그들은 그 분야에서 이미 전문가인 사람들이다.


     교재를 잔뜩 들고 와서는 예전에 해 본 적이 있다고 하는 학생에 당황한 듯한 선생님. 10년 전까지 하고 그 뒤로는 쭉 쉬었다고 내 상황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아예 초보자라면 처음부터 선생님이 본인 방식대로 가르치면 되니까 훨씬 편할 텐데 무슨 종목이던지 애매하게 하다가 온 사람들 가르치는 게 어렵다고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왜냐면 옛날에 좀 했던 가락이 있다고 선생님이 하는 말을 안 듣고 나쁜 습관이 들어있거나 기초를 무시하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난 처음부터 제대로 다시 배울 각오를 하고 왔다. 활 쓰기랑 서드포지션 이런 것들도. 최종 목표는 비브라토를 배워서 멋있고 울림 있게 연주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선생님이 어떤 교재부터 해야 할지 망설이고 계시는 것 같아 난 정말로 스즈키 1권부터 해도 괜찮다고 말씀드렸다. 일단 스즈키 2권을 보자고 해서 조금 해봤고, 흐리말리라는 음계교본이 있는데 앞으로 그것도 병행하기로 했다.


    레슨은 일주일에 1주일에 1회 30분이라 짧지만 진짜 좋은 건 악기는 학원에 두고 다니면서 연습실을 무제한으로 쓸 수 있다는 거다. 바이올린을 배워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게 엄청난 메리트다.


     일반적인 직장인이라면 평일엔 집에서는 연습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아침에 출근했다가 밤에 집에 돌아오면 이미 연습하기 늦은 시각인 데다 활만 그어도 소리가 울린다. 약음기라고, 소리를 줄여주는 장치가 있어서 그걸 끼우고 하려면 할 수는 있지만 약음기를 끼우면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기 때문에 추천하는 방법은 아니다.


     운동도 그렇지만 악기도 레슨 시간에만 하는 게 당연히 전부가 아니다. 악기뿐만 아니라 우리가 배우는 모든 것들이 그렇다. 공부도 마찬가지인데 머리가 아주 좋은 학생이라면 모를까 수업시간에만 공부해선 실력이 늘지 않는다. 수업시간 외에 반드시 혼자서 공부하고 복습해서 자기 것으로 소화시키고 익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악기를 배울 때도 혼자서 연습하는 시간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번에도 내가 집에서 혼자 한다고 했다면 결국 몇 번 하다가 말았을 거다. 레슨비에 언제든 연습할 수 있는 장소 대여료까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결코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앞으로 레슨을 받는 날에는 레슨 앞뒤로 반드시 연습하고 그 외에도 1,2회 정도 따로 와서 연습해야겠다고 결정했다. 학원에 있는 조금 비싼 악기도 써볼 수 있다고 하니 더더욱 기대되었다.


    평소의 나라면 결국 망설이다 또 등록 안/못하고 몇 년 뒤에 후회하는 패턴으로 끝났겠지. 하지만 몇 년 전에도 그런 적이 있어서 이번에 후회했으니까 다음번에 또 그러지 않기 위해 이번엔 일을 저질러 버렸다. 만약 5년 전에 레슨을 등록했다면 몇 년 지난 지금은 얼마나 좋은 소리를 내고 있을까? 앞으로의 일은 알 수 없지만 아마 이번에도 등록하지 않았다면 몇 년 뒤에 지금 하는 고민을 똑같이 할 거고 또 후회할 게 뻔하다.


     독립이 가져다준 힘은 이런 것들이다. 청소하고 밥을 해 먹고 관리비를 내야 하고 부담되는 게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독립이 주는 이러한 편의도 있다. 아마 독립하지 않았으면 여전히 할까 말까 망설이고 부모님의 눈치만 보고 있다가 결국 못했을 것이다.


     6개월만 하면, 그래서 연말정도 되면 괜찮은 소리가 나지 않을까? 오랜만에 왼손으로 현을 짚었더니 손가락이 약간 욱신거렸지만 기분 좋은 피곤함이 느껴졌다. 옛날에 동아리 활동하던 시절엔 뮤직캠프라고, 쉽게 말하자면 여름방학에 펜션 하나를 빌려서 동아리 멤버들 모두가 밥 먹고 자는 시간만 빼고 3박 4일 내내 연습만 하는 행사에도 갔었다. 하루종일 악기를 손에 쥐고 있으니 실력이 쑥쑥 늘기도 했고 그에 비례해 무리를 한 왼손 손가락에는 굳은살이 배기곤 했었다.


십 몇년 전에 30만원을 주고 샀던 나의 두번째 악기. 앞으로 자주 보자 :)


    레슨을 받으면서 가장 놀랐던 건 나는 단지 악기를 연주하는 건데 악기 하는 거 하나만 봐도 나라는 사람이 다 드러난다는 것이었다. 박자를 셀 때도 속으로 하나, 두울, 셋, 셌는데 선생님은 내가 박자를 세는 게 빠르다고 했다. 감추고 싶었지만 성격이 급한 내가 그대로 묻어 나왔다.


     몸이 굳어있는 것도, 항상 긴장해 보이는 듯한 태도도, 오른손으로 활이 자유롭게 써지지 않는 것도, 왼손으로 지판을 짚는데도 팔꿈치가 삐걱거리는 것도 전부 나였다. 나는 기본적으로 겁이 많아서 행동을 할 때 몸이 굳어있거나 긴장해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것들이 다 드러나는 거다.


     테니스칠 때도 숨을 뱉고 삼키는 것도 공을 치는 타이밍 하고 연관이 있는데 바이올린도 마찬가지였다. 활을 아래쪽으로 내려 그을 때 자연스럽게 숨을 내쉬어야 되는 거였다. 평소 우리는 숨을 너무 자연스럽게 쉬고 있어서 그것에 대해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호흡은 중요하다. 운동, 공부, 악기, 연애 등 너무 긴장이 빡 들어간 상태로 하기보다는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하는 게 중요하구나 깨닫는다.


     선생님이 했던 말 중에 기억에 남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내가 너무 정박을 지키려고 한다는 거였다. 선생님 말로는 주로 어른 학생들이 그런 경향이 있다고 했다. 4분 음표든 8분 음표든 두 박자든 세 박자든 너무 열심히, 정확하게 그 박자를 지키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힘을 좀 빼고 해도 된다고 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나는 회계팀에서 일을 하고 있다. 매일매일 숫자를 다루고 이놈의 숫자가 하나라도 틀리면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다. 0.0000001 정도의 오차는 괜찮을지 몰라도 회계장부에 약간의 오차만 생겨도 연결된 숫자가 다 틀어지기 때문에 숫자를 정확하게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남들보다 더 박자에 예민하게 굴었는지 모르겠다. 슬픈 K-직장인, 회계인의 초상이다.




1주일에 1회,
레슨 30분의 시간.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예술을 통해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삶의 태도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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