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일간의 세계일주를 읽고
먼 훗날 아니 그리 먼 미래를 가정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2020년을 되돌아봤을 때 공통적으로 생각나는 것은 바로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닐까?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지구인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코로나가 정말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경제 전반과 삶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신과 기계의 발달로 이전에도 충분히 핸드폰으로 이메일을 확인하거나 메신저로 업무 관련 소통을 하곤 했는데 그걸 넘어서서 집이 곧 일터가 되고, 유튜브를 통한 라이브 콘서트 시청까지... 삶의 기반이랄까 기본적으로 생각해왔던 것들이 모두 바뀌어버렸다.
이런 코로나 시대의 여행이란 무엇일까? 그동안 여행은 어딘가로 이동해서 주변 풍광이 바뀌는 것을 보고 직접 호흡하고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국경이 모두 닫혀버린 이상 해외를 나가는 것은 아주 어렵게 되었고-특히 우리나라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곳은 북한밖에 없기 때문에 해외로 이동하려면 배나 비행기를 타야만 한다-여행을 좋아하는 1인으로서 정말 슬픈 나날을 보내고 있는 요즘이다.
최근에 도서관에 갔다가 피에르 바야르의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이란 제목의 책이 눈에 띄었다. 이 작가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재미있는 제목의 책을 쓴 작가와 동일인물로, 이번 책은 또 어떤 내용일지 궁금했다.
저자는 어떤 주제에 대한 우리의 부분적이거나 완전한 무지가 반드시 그것을 일관성 있게 논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이 세계를 좀 더 잘 아는 용도로 활용될 수 있음을 제시하는 데 있다고 이 책을 쓴 이유를 밝혔다. 책에서는 여행을 하는 여러 방법 즉 가보지 않은 곳, 대충 지나친 곳, 귀동냥으로 들은 곳, 잊어버린 곳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말하는 '물리적인' 의미의 여행은 아니지만 결국 여행의 또 다른 형태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이 책에서 소개된 다양한 책들 중 제목이 낯익은 '80일간의 세계일주'라는 책이 있었다. 이 책은 도서관 서가에서 어렴풋이 본 기억이 있었다. 피에르 바야르는 '80일간의 세계일주'의 주인공인 필리어스 포그가 과연 실제로 여행을 한 것인지 아니면 여행을 하지 않고 어디서 본 신문기사, 주워들은 이야기들로 이야기를 구성한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가 보통 ‘여행을 한다’라고 했을 때는 그 장소에 머무르면서 문화재를 관람하거나, 음식을 먹거나, 현지인과 대화하는 등 현지에서 머무르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필수적인데 필리어스 포그는 오로지 ‘80일’ 동안 ‘세계일주’를 하는 것만 목표인 여행이었기 때문에 해당 도시를 즐길 새도 없이 항구에 정박하는 잠깐의 시간 혹은 이동하면서 보고 느낀 것이 전부인 여행을 했다. 피에르 바야르는 이런 것들도 모두 여행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다음번에 도서관에 갔을 때 '80일간의 세계일주'를 빌려왔다. 어떤 식의 소설일지 궁금했는데 작가가 외부에서 필리어스 포그의 여행을 관찰하며 쓴 이야기인데 의외로 재미있었다. 피에르 바야르가 설명한 것처럼 여행지에서 여행(경험)을 하고 이런 게 아니라 그야말로 세계를 80일 안에 돌아야 하기 때문에 그 도시나 장소에 머무르는 건 교통수단이 바뀔 때 하루 정도나 단 몇 시간뿐이었다. 당시엔 비행기도 없었으니 교통수단도 배와 기차가 대부분이었고 인도에선 코끼리를 타기도 했다. 이러한 필리어스 포그식의 여행의 의의에 대해 작가가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남긴 말을 인용한다.
“이렇게 하여 필리어스 포그는 내기에 이겼다. 그는 80일 동안에 세계일주를 끝마쳤다. 그러기 위해 온갖 탈것을 이용했다. 기선, 기차, 마차, 요트, 상선, 썰매, 심지어는 코끼리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이 별난 신사는 놀라운 침착성과 정확성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이 여행에서 그가 얻은 이익은 무엇인가? 그는 이 여행에서 무엇을 가지고 돌아왔는가? 아무것도 없다고 사람들은 말할까? 확실히, 한 아리따운 여성 말고는 아무것도 얻은 게 없었다. 그러나 좀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그 여성은 그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로 만들었다. 사실 우리는 그보다 훨씬 하찮은 것을 위해서라도 세계일주를 하지 않을까” (80일간의 세계일주, 쥘 베른, 366쪽)
재밌게 책을 읽고 나니 이 시기가 끝나면 다음 여행을 어디로 갈까 생각하게 된다. 이런 상황이 장기화될 것으로 보여서 다음 여행에 대한 미련은 버리고 여행 생각은 아예 접어두고 있었다. 왜냐면 자꾸 여행에 대해 생각할수록 여행을 가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 미워지니까.
그렇지만 책을 읽으면서 퍼뜩 떠오른 생각 하나. 주인공 포그는 비행기가 없던 시절, 그 당시에 가능한 교통수단으로 최대한의 이동시간을 고려해서 80일 안에 세계일주(라기엔 북반구 일주라는 표현이 좀 더 정확할 듯 하지만)를 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은 비행기가 있으니까 비행기만 탄다면 2,3일 안에 북반구를 '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업무 특성상 내가 휴가를 가장 길게 쓸 수 있는 것은 최대 2주(14일)이다.
그럼 14일간의 (북반구 한정) 세계일주를 해 보는 건 어떨까?
포그와 같이 계속 이동하는 여정의 형태를 지닌 ‘여행’ 말이다.
아, 그렇다고 포그처럼 정말 딱 이동만 하지는 않을 거다. 미대륙 한 군데, 유럽 한 군데, 아시아 한 군데 총 3군데 정도 거점을 잡아서 각 거점 간은 비행기로 이동하고 그래도 각 여행지에서 2,3일 정도 머무르며 구경을 하자.
포그처럼 시차를 손해 보지 않으려면 먼저 미대륙 방향으로 가야겠지? 사실 아직까지 미대륙은 나에게 미지의 세계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뭐랄까, 미국은 너무 뻔할 거라고 생각되어 지금까지 남겨뒀었다. 그리고 살면서 언젠가, 어떻게든 한 번은 가지 않을까 싶은 마음도 있었다. 지금 동생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일을 하고 있다. 내가 갈 그 날까지 있을지 모르겠지만 만약 동생이 그때까지 미국에 있다면 역시 그녀가 있는 로스앤젤레스로 가야 할까? 아니면 센트럴파크와 유명한 박물관이 많은 뉴욕으로 갈까?
미대륙을 건너 다음 여행지인 유럽 대륙에선 어디로 갈까? 유럽은 최근 4년간 휴가를 끌어모아 매년 여름마다 갔었기 때문에 이미 많은 도시들에 내 발자국을 새겨 놨었다. 그러니 새로운 곳보단 이미 가봤던 곳에 다시 가보는 것은 어떨까? 2009년 대학생 때 처음 유럽 땅을 밟았던 파리는 어떨까? 20대에 방문했던 파리를 30대가 되어 방문한다면 다른 기분이 들 것이다. 게다가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있으니 현지에서 프랑스어를 써볼 수 있지 않을까?
자, 이제 마지막 여정인 아시아 대륙에선 어딜 가볼까? 중국어를 공부하고 있으니 중국에 가보고 싶지만 비자 비용이 별도로 드니 다음으로 미루고... 그렇다면 인도차이나 반도에 한번 가볼까? 인도차이나 반도에 있는 나라들 중에 태국의 수도 방콕과 파타야,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 짧게 가본 것이 전부이다. 그러니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태국의 치앙마이가 왜 그토록 유명한지 알고 싶고, 캄보디아의 유명한 유적지인 앙코르와트도 궁금하고, 라오스 특유 분위기를 많이 느낄 수 있다고 하는 루앙프라방에도 가보고 싶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국가들은 국경을 맞대고 있으니 한 군데에서만 머물지 않고 기차나 버스로 국경을 넘어 2개 국가를 여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코로나 종식 이후에 하는 모든 여행은, 아니 특히 이런 형태의 여행은 자유롭게 넘나들던 국경이 모두 닫히고 서로를 배척하고 있는 이 상황이 완화된 다음에 하는 여행이라면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 그리고 여행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게 될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으니 방구석에서 할 수 있는 여행을 계속해야겠다. 책으로 하는 여행 혹은 누군가의 유튜브를 통해 하는 여행과 같은 형태의 여행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