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에서 우연히 만난 러버덕, 서울에서 다시 만나다
나는 2012년 12월 31일 자로 첫 번째로 다녔던 회사를 퇴사했다. 그리고 곧바로 2013년 1월, 추운 우리나라를 떠나 따뜻한 남극 나라로 가겠다는 결심 하에 계절이 반대인 남반구에 있는 호주에 여행을 가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한 나라의 수도가 사람들에게 제일 많이 알려져 있지만 호주에서 제일 유명한 도시는 누가 뭐래도 '시드니'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수도는 캔버라. 들어보신 적 있나요? ㅎㅎ) 시드니는 제일 유명한 도시니까 가장 먼저 방문하기로 했다.
시드니 시내를 돌아다니다 서큘러 퀘이Cirqular Quay 근방에 띄워놓은 노란색 대형 오리 조형물과 마주쳤다. 이 노란 오리는 매우 귀여웠고, 친구 중에 별명이 오리인 친구가 있어서 잠시 그 친구 생각도 났다. 나는 단지 시드니에서 무슨 이벤트를 하는 것이라 생각했고 귀엽고 특이해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이 귀여운 오리는 여행의 기억 속 한 페이지에 묻혀 있었다.
약 열흘 간의 호주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놀기도 하고, 학원도 다니고 다시 취직 준비도 하고... 시간이 지나 다시 일을 하게 되면서 집-회사만 왔다 갔다 하는 전형적인 직장인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잠실에 롯데월드 타워를 개관하면서 그 기념으로 석촌호수에 그 귀엽고 노란 오리, 러버덕을 전시한다고 했다.
러버덕 전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를 돌고 있는 러버덕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된다고 했다. 최근에 읽었던 책에서 마침 러버덕 전시에 대한 소개가 있어서 가져왔다.
삭막한 도시에 다정하게 말을 거는 설치미술 러버덕
잠실 석촌호수에 갑자기 등장한 노란색 오리 한 마리. 무게만 1톤이 넘는 '러버덕Rubber Duck'이라는 이름의 이 오리는 2014년 가을 한 달간 무려 440만 명의 관람객을 만났다. 당시 SNS에는 러버덕 피드와 해시태그가 대유행이었다.
러버덕은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공공미술가 플로렌타인 호프만Florentijn Hofman이 제작한 설치 작품이다. 2007년 처음 선보인 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비롯해 오사카, 시드니, 상파울루, 홍콩 등 전 세계 16개국을 돌며 평화와 행복의 메시지를 전해왔다.
미술관이 아닌 도심의 호숫가에서 만나는 예술 작품은 관객들에게 예술의 의외성을 경험하게 해 주었다. 호프만은 실생활에서 쉽게 접하는 소재를 활용해 거대한 크기의 초대형 작품을 만든 후 삭막한 도심 한 곳에 설치해서 그곳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일상에 예기치 못한 즐거운 사건을 만들어준다.
그의 다양한 프로젝트는 단순한 작품 전시를 넘어 '치유와 교훈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러버덕 프로젝트의 경우 '세월호 사고로 실의에 빠진 한국 국민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나누고 상처를 치유하는 힐링의 기회가 되길 기원한다'는 그의 바람을 담았다. 국경과 경계, 그 어떤 정치적 의도도 없는 예술이 지닌 자유와 치유의 힘을 보여준 것이다.
(중략)
"작품의 존재만으로도 사람들을 미소 짓게 만들고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갖게 하고 싶다." 이런 호프만의 바람대로 전 세계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통해 미술관 밖으로 '도망친' 예술을 만나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공간과 예술의 컬래버레이션'은 뜻밖의 장소에서 예술을 만나는 행복한 경험을 선사한다.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도시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설치미술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일본 나오시마의 상징과도 같은 구사마 야요이의 작품 '노란 호박'과 625 전쟁 70주년을 기념해 강익중이 광화문에 선보인 '광화문 아리랑'처럼, 특정 지역의 아이콘이 되거나 역사적 스토리를 상징하기도 한다. 삭막한 도시와 적요한 섬도 예술 작품이 들어서는 순간,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EBS 지식채널 e X 누구나 예술가 편
PART 2 Gallery
벽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p.81~85
나는 러버덕의 사진을 보는 순간 '어? 이거 호주에서 봤던 거랑 똑같이 생겼잖아?'라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호주 시드니에 전시되었던 그 러버덕도 이 러버덕 프로젝트 때문에 설치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신기했다. 우연히 여행지에서 마주친 그 오리를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다니! 두근두근 했다. 관련 기사도 많이 뜨고 화제가 많이 되었다.
앞에서 언급했던, 별명이 오리였던 그 친구와 석촌호수에 러버덕을 보러 가기로 했다. 시드니에서 봤을 땐 사람들이 그렇게 러버덕에 관심 있어 보이지 않았는데 서울 전시에선 석촌호수로 가는 길목부터 사람들이 많았다. 게다가 굿즈샵에는 줄이 길에 늘어서 있었다. 먼저 러버덕부터 구경하고 와서 굿즈샵에 들르기로 했다.
서울에서 다시 본 러버덕은 역시나 귀여웠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많아서 찬찬히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친구와 사진을 찍고 호수를 좀 걷다 굿즈샵으로 이동했다. 줄을 서서 한참 후에 입장했다. 그런데 전시 시작 직후가 아니라 한참 진행된 이후에 가서인지 마음에 드는 굿즈는 다 팔리고 없었다. 노란 오리 한 마리를 보기 위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니 참으로 놀라웠다.
얼마 전 인터넷으로 하버드에서 촬영한 코딩 강의 동영상을 보고 있는데 강의 테이블에 노란색 러버덕이 여러 개 놓여있어서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코딩이랑 러버덕이랑 대체 무슨 상관이 있지? 교수님 취향인가? 생각했었다.
그런데 몇 강이 진행되고 나자 교수님이 '러버덕 디버깅'이란 단어에 대해 설명했는데, 이것은 코딩을 하다가 잘 안 풀릴 때 곁에 있는 러버덕에게 혼잣말로 이것저것을 말하면서 디버깅(오류 수정)을 하는 것을 일컫는 뜻한다고 했다.
서양 문화권에서는 아기들이 목욕할 때 욕조에 러버덕을 띄워주고 같이 놀게 한다고 하니 어렸을 때부터 집에 러버덕 한 개쯤은 갖고 있는 모양이다. 곁에서 흔하게 찾을 수 있고 누구나 가지고 있는 물건이니까 일이 잘 안 풀릴 때 토로할 수 있는 대상으로도 적합한 거겠지.
일반적으로 미술(예술) 작품은 미술관이나 한정된 공간 안에 전시되는 경우가 많은데, 앞에 인용한 책 'EBS 지식채널 e'에 나온 설명과 같이 이렇게 공공장소나 외부에 설치된 작품들은 설치미술이라 일컫는다고 한다.
우리는 미술관이나 공연장에 가야만 예술 작품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한 그곳에 전시된 작품들의 의미는 무엇인지,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진정으로 작품을 이해하는 것이라 교육받아 왔기에 예술을 향유하는 것이 어렵다고 느끼며 친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서양 문화권 한정이긴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항상 함께 있었고 집 안의 욕조를 떠다니던, 한 손에 들어오는 크기의 고무 장난감인 러버덕이 익숙했던 실내를 벗어나 야외의 호수로 나왔고 단지 크기만 엄청 커졌을 뿐인데 그것이 호수에 띄워진 러버덕을 바라보는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재미와 위로를 주었다.
꼭 미술관이라는 정제된 공간에 찾아가지 않아도 좋다. 우연히 여행지를 지나가다 혹은 출퇴근길 버스 안에서 본, 설치미술 작품이 세워진 그곳이 그날의 날씨와 기분과 어우러져 각자의 미술관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 러버덕을 다른 곳에서 또 만난 적이 있다. 러버덕 프로젝트를 시작한 사람이 네덜란드 사람이라 그런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는 러버덕만 파는 가게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암스테르담을 여행할 때 그 가게를 찾아갔었다.
온갖 모양과 캐릭터들과 합체된 노란색 러버덕이 가게를 뒤덮고 있었다. 아쉽게도 가게 내부 사진은 찍지 않아서 사진이 없다. 뽐뿌를 부르는 수많은 러버덕 중 무얼 살까 고민하다 네덜란드를 상징하는 무늬가 들어가 있는 노란 러버덕 한 마리만 데리고 왔다. 러버덕을 사랑하는 분이라면, 네덜란드에 갈 일이 있을 때 한 번 들러봐도 좋을 것 같아 아래에 링크를 첨부한다.
Amsterdam Duck Store @ Amsterdam, Netherlands
https://g.page/amsterdam-duck-store-amsterdam?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