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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니seny Dec 10. 2022

생일날, 처음으로 휴가를 내보다 (하)

생일날 읽기 시작한 <H마트에서 울다>와 엄마에게서 걸려온 전화

 '생일날, 처음으로 휴가를 내보다(상)'에서 이어집니다.




     원래 생일날 와인 마시면서 먹으려고 인터넷으로 신림동 백순대 밀키트를 준비했는데 와인은 주말에 먹기로 하고 백순대 밀키트만 깠다. 백순대라니, 추억의 음식이다. 내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신림동이 핫플레이스였고 그곳에 가는 게 유행이었다고 해야 할까?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끝나면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 무조건 가는 곳이었다. 중고등학생 이후로 먹어본 적이 없으니 엄청 오랜만이다. 이제는 신림동 백순대 타운에 가지 않고도 집에서 맛볼 수 있다니. 조리법은 간단했고 밥을 조금 떠서 밥과 함께 먹었다.



나를 위해 사온 꽃다발과 생일날 오후를 함께 보낸 책들.



  생일이 뭐 별거일까?
    평일인데 회사에 얽매이지 않고 
마치 주말처럼,
    나한테 하루를 온전히 쓸 수 있다면...
 그거면 된 거 아닐까? 



     그리고 이어지는 독서시간. 빌려온 책도 조금씩 읽자. 이번 달 김영하북클럽 책은 <H마트에서 울다>라는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 교포가 쓴 책이다. 돌아가신 한국인 엄마와의 추억담을 미국에 있는 한인마트인 H마트에서부터 시작해 각종 한국 음식과 그와 관련된 엄마와의 추억들이 함께 펼쳐지는 이야기다.


     그러고 보니 나 오늘 생일인데 돌아가신 엄마와의 추억담을 이야기하는 에세이라니... 아직 읽지도 않았는데 제대로 눈물 흘릴 각이겠다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책을 몇 페이지 펼치지도 않았는데 눈에 눈물이 그득그득 고여오기 시작한다. 미리 빌려다 놓은 이 책을 하필 내 생일날에 딱 맞춰서 펼친 건 운명이었을까.


     한참 울려고 준비 중인데 전화 벨소리가 울린다. 회사인가? 하면서 핸드폰 액정을 흘끔 봤는데 엄마다. 엄마는 집에 잘 들어갔냐면서 예전에 수영하던 친구를 만났는데 어쩌고 저쩌고... 하며 뜬금없이 대화를 시작한다. 독립하게 된 후로 엄마와 일상적인 이야기는 주로 카톡으로 하고 주로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전화를 하고 있었다. 


     엄마가 전화를 했으니 뭔가 중요한 일이 있나 싶어 전화를 받은 건데 엄마는 카톡으로 해도 될 얘기를 전화를 걸어 주절주절 하고 있었다. 이제 막 책을 펼쳐서 읽기 시작했는데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받은 느낌이었다. '이 전화 뭐야? 별로 중요한 내용도 아닌 거 같은데.. 도대체 엄마는 왜 전화한 거지? 전화 언제 끊으려나?'라고 생각하다 어느 순간 책을 탁 덮었다. 책은 나중에 읽으면 되지, 아직 오늘 하루 한참 남았는데 뭘. 


     <H마트에서 울다>의 저자는 더 이상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고 엄마가 만든 음식을 먹을 수도 없다. 그런데 나는 아직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런 엄마의 수다를 잠깐 못 들어줄까? 복에 겨운 소리다. 그래서 책을 덮고 한참 동안 엄마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엄마와의 통화가 끝나고 책도 조금 읽었다. 이제 또 뭘 해볼까? 아참, 발에 매니큐어 좀 발라야겠다. 별것도 아닌데 평상시에는 이거 바를 짬도 안 나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바를 시간은 있다. 매니큐어를 바르는 것 자체는 5분도 안 걸린다. 문제는 매니큐어가 마르길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매니큐어가 마르길 기다리면서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 그 시간을 기다릴 여유가 없는 것이다. 오늘은 여유가 있으니까 매니큐어를 잘 바르고 충분히 마를 시간을 주었다.


     그렇게 멍 때리고 앉아있자니 어젯밤에도 늦게 잤는데 오늘 일찍 일어나서 졸려오기 시작한다. 안 되겠다. 30분만이라도 좀 누워있자. 아까 커피를 먹지 않았던걸 후회했다. 하지만 잠깐만 누운다고 하는 건 언제나 그렇듯 세상모르게 꿀잠에 빠지고 만다. 실컷 자고 일어나니 저녁 10시가 넘어있었다. 생일 거의 다 갔네.



2022년의 생일을 축하하며 산 블루베리가 얹어진 조각 케이크.



     저녁을 먹기엔 시간도 늦었고 아까 낮에 점심도 잘 먹어서 패스하기로 했다. 대신 어제 사온 케이크를 아직 안 먹었길래 이걸 먹기로 했다. 생일 기념으로 사 온 거고 아직 12시 안 지났으니까. 생일 축하노래도 부르지 않고 그저 포크로 푹푹 떠서 케이크 한 조각을 다 먹어버렸다.


      오늘 청소하기로 했는데 청소는 못했지만 쓰레기는 비워야 할거 같아서 쓰레기를 비우고 이것저것 치우고 나니 12시가 끝났다. 12시가 지났으니 신데렐라의 마법은 풀렸고 새로운 1년이 시작된다.






     점점 나이 세는 게 어색해진다. 옛날엔 스물다섯이에요, 스물일곱이에요 하며 내 나이를 아주 정확히 알고 있었고 한국식 나이로 당당하게 말하곤 했었다. 그런데 요즘엔 자꾸 만 나이가 정확한 거 아니냐고 따져 묻기 시작했으며 회사에서는 나와 띠동갑 아니 그 이상으로 어린 파릇파릇한 20대 초반 직원들이 입사하기 시작했다. 


     네이버에 나이 계산기라고 쳐서 태어난 연도를 입력하고 나이를 검색해봤다. 오늘부터 새로운 만 나이의 시작이다. 이왕 아는 거 정확히 알아야지. 피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어제 친구에게 '나는 왜 이렇게 재미없게 살았을까?'라고 한탄했다. 나를 잘 아는 친구는 다른 방식의 삶이 편했으면 그렇게 살았겠지만 너는 네 성향에 맞게 잘 살아온 거라고 했다. 만약 지금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왔다면 지금 네가 누리고 있는걸 누리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하면서. 



나는 내 방식대로 잘 살아온 거다.
그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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