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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없이 외삼촌댁에서 하룻밤 보내기

부모님 없이 어른인 친척과 시간 보내기 그리고 8년 뒤...

by 세니seny

<2014년 8월, 광주 페퍼토닉 여행기 (하) 편>에서 이어집니다.




터미널에 도착해 얼른 버스표를 끊고 나니 출발시간까지 15분 정도 남았다. 버스는 출발 직전에만 타면 되니까 아슬아슬한 핸드폰 배터리 좀 어떻게 해야겠다 싶어 매의 눈으로 콘센트를 발견해 10분 정도 충전을 했다. 그래도 여전히 배터리는 부족했지만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고속버스는 거의 만석이었고 곧 출발했다. 저녁으로 아침에 삶아온 계란을 까먹으면서 페퍼톤스의 <검은 우주>를 들었다. 버스의 불을 꺼주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쉬웠다. 낮에 먹은 커피 때문인지 피곤한데도 잠은 오지 않아 눈을 말똥말똥한 상태로 계속 음악을 들었다.


토요일 밤, 뻥 뚫린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려 익산에 들렀다가 도착지인 군산에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다. 그래서 아직 마중 나오기로 한 삼촌이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전화를 했다. 이렇게 삼촌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건 처음이라 긴장됐다.



외삼촌은 전화를 받자마자
'OO아!'라고 내 이름을 불러주셨다.



삼촌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이 낯설고 황량한 버스터미널 안 의자에 허리를 구부리고 앉아서 배터리가 곧 떨어질 핸드폰만 붙잡고 의지하고 있는 나에게, 속에서 울컥함 같은 것이 올라왔다. 삼촌이 곧 도착한다고 하시며 전화를 끊으셨다. 그리고 버스터미널 밖에서 삼촌을 만나 차에 올라탔다.


엄마나 아빠도 없이 친척네 집에 가는 건 처음인 데다 밤늦게 찾아뵈는 거라 미안하고 민망했다. 그래서 가자마자 인사하고 바로 씻고 자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가는 길에 이런저런 얘기를 하시는데 왠지 들떠보이시는 느낌도 들었는데 그런 마음이 나에게 전해져서 좋았다.


내가 어렸을 때 살던 아파트에서 취업준비 때문이었나 하여간 삼촌이 올라와서 얼마간 같이 살았다는 얘기도 하셨는데 내가 어렸을 때라 그런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엄마에게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 기분만 남아 있었다. 삼촌의 자녀들 즉 나에게는 사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를 전해 들었고 맥주나 한 잔 하자는 아주 멋진 제안까지 해주셨다.


하지만 나는 엄마도 없이 있는 이런 자리가 좀 민망하고 쑥스러웠고 며칠간 삼촌이 회사를 출근하면서 할아버지 병간호에 시달렸다는 걸 알고 있는지라 왠지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 아주 철딱서니 없는 어른이 될 것만 같아 만류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좀 아쉬웠다.


외삼촌댁에 들어가서 숙모께 인사를 드리고 방에 막내가 있으니 나와서 인사하라고 부르셨다. 삼촌네는 자녀가 셋인데 서울에 있는 첫째와 둘째만 생각했지 막내가 집에 있으리라곤 생각 못했네? 아무튼 막내와 인사하고 막내는 다시 자기 방으로 쏙 들어갔다. 안 그래도 어제 우리 아빠도 여기 왔다 갔다면서 아빠가 자고 간 방이니 아빠 냄새날 거라며 (ㅋㅋ)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어 지금은 비어있는 사촌 여동생의 방을 안내해 주셨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갔다. 세수를 하고 몸에 물만 끼얹었는데도 시원하고 기분이 좋았다. 공연 보면서 땀도 엄청 흘린 상태 그대로 터미널 가는 버스를 탔는데 버스를 잘못 타서 당황한 데다 하루종일 밖에 있어서 이도 못 닦았다. 씻고 나왔는데 곧 추석이라 첫째, 둘째가 서울에서 집에 내려오는지 기차 시간에 대한 얘길 하고 계신다.


이대로 '안녕히 주무세요'라고 인사하고 이제 잔다고 말해야 하나? 뻘쭘해서 방에 들어가 침대에 앉아있었다. 그랬는데 과일이라도 먹으라고 부르신다. 시간도 늦었고 안 먹겠다고 했지만 자꾸 권하시고 사실 나도 배가 고파진 터라 복숭아 한 개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거의 한 시간가량 대화를 나눈 것 같은데 이렇게 길게 얘기하게 될 줄은 몰랐다. 사촌들 이야기부터 할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실 때의 상황, 외삼촌이 다니던 고등학교 서무실에서 우리 엄마가 직원으로 근무하던 때의 이야기 또 내가 잘 모르는 엄마의 이야기 등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외삼촌 말마따나 언제 이렇게 우리가 고개를 마주하고 이야기를 할 수 있겠냐는 말이 뇌리에 남았다.


나는 이번 여행에 앤드류 포터의 단편소설 모음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가지고 갔었다. 이런 대화를 나누고 다음날 아침 병실에서 주무시는 할아버지를 두고 혼자 앉아 책을 읽었는데 어제저녁 삼촌댁 거실에서 대화를 나눴던 풍경이 문득 앤드류 포터의 단편소설에 나올법한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풍경은 내가 두고두고 생각하게 될 장면이 될 것이라고.


외삼촌과 외숙모와 같이 앉아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나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의외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나도 할 말이 많아졌는데 외삼촌이나 외숙모도 말을 많이 하셔서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못한 말들도 많았다. 계속 얘기하다 보니 생각보다 이야기가 길어져서 시간이 늦어졌기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방으로 들어가서 다이어리 정리를 했는데도 여전히 던킨 도너츠의 아메리카노 때문인지 잠이 쏟아지지 않았다. 굉장히 피곤한데 잠으로 빠져드는 마지막 단계를 통과하지 못해 약간은 붕 뜬 기분으로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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