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20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16. 날 밤새고 조조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관람기

by 세니seny Mar 13. 2025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그런데 진짜 새벽 6시까지도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이 말똥말똥. 그럼 이제 씻자. 샤워하고 머리도 감고 아침도 간단히 먹었다. 영화만 보고 후딱 올 거니까 옷은 간단히 입고 화장은 안 할 거지만 선크림은 발랐다. 그리고 나는 입술색이 없으면 사람이 핏기가 없어 보여서 아파 보이니 립글로스만 바르기로 한다.


      외출 준비를 마치고 집 밖으로 나왔다. 간밤에 소나기가 왔었는데 지금은 싹 그쳐서 공기가 말끔했다. 이제 아침 7시쯤이다. 천변을 걸어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중. 오늘은 토요일 데도 아침 운동하러 나온 어르신들이 보인다. 천변 인도 양 옆으로 심어진 우거진 나무 너머로 옅은 하늘빛 하늘이 언뜻언뜻 비친다.


      버스정류장에 서니 마침 영화관까지 제일 가까이 가는 마을버스가 온다. 마을버스와 시내버스는 요금차이가 300원 난다. 300원은 결코 큰돈이 아니지. 하지만 시내버스가 먼저 오면 그걸 타긴 해도 백수가 돼버린 나는 마음속으로 은근히 요금이 300원이라도 저렴한 마을버스가 먼저 오기를 기다린다.


       버스 안은 조용하다. 기사님이 라디오도 틀지 않았다. 남들이 일하는 평일에 조조영화를 보러 나갔다면 지금은 출근길 지옥에 그들과 함께 했겠지. 그러면서 그들과 나의 처지를 비교하며 나에게 좋은 점ㅡ그들과 달리 아침부터 일어나 출근지옥에 시달리고 회사지옥에 시달리지 않는다는 점ㅡ은 기뻐하고 나에게 나쁜점ㅡ대신 월급과 지위와 명예가 없어짐ㅡ은 기분 나빠하겠지.  


     하지만 지금은 누가 뭐래도 토요일 아침 7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다. 그러니 버스 내부도 한산하고 창 밖으로 비치는 길거리도 한산하다. 평화롭다.


     버스에서 내려 영화관이 있는 쇼핑몰 건물로 들어선다. 혹시 쇼핑몰 입구가 막혀있을까 걱정했는데 문은 열려 있었다. 쇼핑몰 내부 가게는 문을 안 열었지만 영화관까지 걸어 다니는 통로는 이용할 수 있었다.


     이렇게 넓은 곳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쇼핑몰만 봤었는데 사람이 안 보인다. 나 밖에 없어. 잠들어 있는 쇼핑몰을 조용히 걷는다. 쇼핑몰을 사람에 비유한다면 나는 쇼핑몰에 침입한 낯선 꿈같은 존재다. 평온한 렘수면에 파문을 일으키는, 뇌신경을 헤집고 다니는 방해자.


     한참 걸어 영화관에 도착했다. 여기도 사람들이 드문드문 있어서 조용하다. 잠깐 로비에 앉아있다가 영화 보러 입장한다. 영화 보면서 졸지는 않겠지?


      오늘 볼 영화는 일본영화 <퍼펙트데이즈>다. 남들의 추천과 원래 일본영화를 잘 보는 편이라 내가 좋아하는 영화일 것 같아서 줄거리도 거의 안 훑어보고 무작정 왔다.

     일본영화가 대체로 잔잔한 편이긴 한데 이건 그중에서도 증말 잔잔 그 자체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하루와 그 속에서 벌어지는 자그마한 사건들. 하지만 너에겐 너의 세계가 있듯이 나에겐 나의 세계가 있다. 아마 가족 내에 무슨 갈등이 있었던 듯한데 자세한 연유는 나오지 않았다.


지금은 지금.
다음은 다음.


      처음에 주인공이 말을 거의 안 하길래 '원래 말을 못 하는 설정인가?' 했는데 자신과 관계가 깊은 사람들 그리고 정말로 필요할 때만 말을 한다. 청소 노동자 그중에서도 화장실만 청소하는 노동자. 그래서 청소 노동자 중에서도 가장 무시당하는 사람. 하지만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말을 거의 하지 않아도 동네에 있는 단골 가게에 들르고 주말에는 빨래를 하고 중고서점에 들러 100엔짜리 중고책을 사며 잘 지내고 있다.


       항상 차에 타면 오래된 카세트테이프에 담긴 노래들을 듣는 주인공. 내가 현재 운전하고 있는 차는 첫 차이기도 한데 부모님이 타던 차를 물려받은 거라 출고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오래된 차다.


      그러다 보니 당시엔 나름 최신 기능이랍시고 카세트테이프 플레이를 할 수 있는 기능 대신 CD를 플레이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요즘 누가 CD를 듣는가?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USB를 연결해 노래를 듣도록 바뀌었고 이제는 핸드폰으로 바로 연결해서 듣고 싶은 노래를 마음대로 듣는다.


     하지만 나는 좋아하는 가수에 한해서는 CD를 산다. 지금은 좋아하는 가수가 줄었지만 나는 여전히 CD를 산다. 그래서 주인공이 카세트테이프를 듣는 것처럼 차에서 이제는 한물갔다고 불리는 CD를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언젠가 차를 바꾸게 된다면 더 이상 불가능한 일이겠지.


     주인공은 특이한 삶을 사는 사람으로 취급받곤 하는데 가만 보니 나도 그런 건가? 남들이 사지 않는 CD를 사고 아무도 나가라고 하지도 않은 멀쩡한 직장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한다고 발버둥 치는 중인 나. 하지만 남들이 뭐래도 지금의 나는 굉장히 평온하고 나름의 '퍼펙트데이즈'를 보내고 있다.


     굉장히 일본 스러운 풍경이 넘쳐났던 영화였다. 주인공 집 근처에 있는 스카이트리가 계속 비쳤다. 나는 여태 일본여행을 여러 번 갔지만 이상하게 도쿄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마치 우리나라에 온 외국인 관광객이 부산, 광주, 경주 심지어 제주도도 가봤는데 서울만 안 가본 것 같달까. 나는 올해 말에 도쿄에 갈 예정이라 슬슬 비행기표를 끊고 여행코스를 짤 예정이다. 도쿄의 스카이트리는 '여행 가서 봐야 할 리스트'에 추가되었다.


     2시간짜리 영화 한 편을 다 보고 나왔는데도 아침 10시가 안 됐다. 아직도 영화관이 입점해 있는 쇼핑몰 정식 개장시간이 되지 않아서 여전히 가게들의 불도 꺼져있고 분위기가 썰렁한다. 그래도 아까보다 쇼핑몰 개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많아졌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서 한숨 자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15. 날 밤새고 조조영화를 보러 가게 된 이유는?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