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의 기록 : 햇살 눈부신 날, 서울 끝의 작은 수목원 걷기
<서울탐방 제15탄 : 푸른 수목원과 항동 철길 (상)>편에서 이어집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네비를 따라 수목원에 도착했다. 바로 부천 옆에 붙어있다 보니 지명이나 안내에도 계속 부천이 나온다. 나에게 부천은 7월 한여름의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의미한다. 곧 판타스틱영화제를 보러 부천에 가야겠구나. 주위에 아파트가 좀 있었는데 그 사이로 널찍한 공간이 보인다. 나는 도심 속에 있는 자연을 사랑한다.
입장료는 무료지만 주차는 돈을 약간 내야 한다. 그래도 주차할 곳이 있으니 다행이다. 평일이라 자리가 많이 남아 있었다. 수목원으로 들어가는 입구 왼쪽에는 카페가 있고 오른쪽에는 북카페가 있다. 이런 장소에 북카페가 있다는 게 신기해서 들어가 본다.
작지만 깔끔했다. 벽면엔 액자처럼 식물 표본이 걸려 있었고 이름이 북카페인만큼 반대쪽에는 책도 있었다. 아이들을 위한 동화책이나 그림책도 있었고 어른들을 위한 '삶은 무엇인가'와 같은 철학서도 있었다. 북카페가 있는 곳이 수목원이니만큼 주제에 맞게 정원 가꾸기나 야생화 도감 같은 책들도 눈에 띄었다. 차분히 앉아서 책을 읽고 싶지만 오늘은 일정이 있어 서둘러야 했기에 쓱 둘러보기만 하고 나왔다.
밖으로 나와 발길 닿는 데로 슬슬 걷는다. 중간중간 나무데크도 있고 물에는 갈대들도 서있다. 곳곳에 시냇물도 흐르고 오월이다 보니 풀도 어느 정도 우거졌다. 여기저기 의자도 많았다. 평일 오전이다 보니 주로 나이가 조금 있는 분들이 많았지만 어느 유치원에서 단체로 소풍을 나왔는지 유치원 아가들과 선생님이 계속 눈에 띄었다.
선생님은 각자 아이들을 대여섯 명 정도 데리고 다녔는데 수목원 내에서 여기저기 뛰어노는 아이들을 통제하거나 이 멋진 순간을 남길 사진을 찍어주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계셨다.
나 같은 경제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는 30대 정도 돼 보이는 젊은 사람들은 사무실에 갇혀 있느라 그런지 도통 보이지 않았다. 애기를 데리고 온 엄마들도 있었고 입장료가 무료라 그런지 근처에 사는 사람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은 조깅을 하고 있었다. 슬슬 걷다 보니 수목원 제일 끝에 있는 온실까지 도착했다. 온실도 쓱 둘러본다. 온실은 묘하게 온도가 높다.
다시 입구 쪽으로 돌아 나오는 길에 아까 봐두었던 작은 오두막에 들어가 본다. 애기들만 들어갈 수 있는 사이즈라고 생각했는데 성인 여자 3명이 들어가 있길래 나도 들어가 봤다. 어른도 들어갈 수 있었다. 의외로 아늑했다.
작은 오두막에 앉아 노리플라이의 밝은 노래를 듣는다. 찬란한 신록이 넘실대는 이 계절에 어울리는 노리플라이의 <beautiful>과 <눈부셔>를 선곡했다. 행복해. 내가 앉아있는 곳 바로 근처엔 사람도 안 다녔다. 작은 오두막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보니 마치 내가 동화책 그림의 한 장면에 쏙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오두막 속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다 보니 낙서가 눈에 띈다. 최근 낙서도 있지만 2017년 낙서가 눈에 들어온다. 이때 초등학교 6학년이면 지금 몇 살이냐… 헉, 고3이다. 얘들아, 잘 지내니? 여기 낙서한 건 다 잊고 열공 중이겠구나. 힘내, 얘들아.
수능만 끝나면 세상은 너희들의 것이라 하지만... 아닐 거야. 수능이 세상에서 제일 큰 벽 같아 보이지만 또 다른 어려움이 닥쳐올 거야. 당장은 수능 끝난 것만으로도 엄청 신나는 하루하루가 펼쳐지겠지. 술도 진탕 마시고, 취하고, 토하고 도대체 이걸 왜 먹나 싶으면서도 또 먹지. 벚꽃의 꽃말이 중간고사라는 것도 알게 되고 그렇게 캠퍼스를 걸으며 연인이 되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하고, 군대에 가고, 군대를 보내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나 졸업해서 뭐 먹고 살지? 하는 걱정을 하게 될 테고.
고등학교 때 낄낄대면서 학교 다니는 게 좋았던 거네,라고 깨닫기도 할 테지. 아직까지는 그 시절 친구들과 여전히 잘 지내겠지만 1년, 2년, 3년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 친구들도, 거리감이 느껴지는 친구들도 생길 거야. '우리는 절대 안 그럴 거야' '평생 짱친으로 남을 거야'라고 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친구들과 멀어지게 될 거야.
이 모든 건
지금은 절대 모를 이야기.
알 수도 없고
믿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
시간이 흘러감에 몸을 맡기며 답을 찾아내길 바라. 술 먹고도 다음날 체력이 쌩쌩한 날이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만 같은, 나이가 먹는 게 무언지 잘 모르겠지만 해가 되면 나이는 바뀔 거고 그냥 그런가 보다 하다가 어느 순간에 선배들이, 사촌 언니나 오빠들이, 엄마와 아빠가 왜 나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머리를 탁 치며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오기도 할 거야.
한참을 앉아있다가 권순관 1집을 랜덤으로 들으며 걸어 나온다. 좋다. 너무 좋다. 오늘 날씨도 너무 좋지만 나를 감싸고 있는 이 따스함이 너무 좋다. 입구까지 걸어 나오면 오늘 나를 여기까지 오게 했던 항동 철길이 있다. 이 항동 철길이 수목원의 입구 같은 느낌이다. 기차 지나가는 건널목에는 신호등도 있고 차단봉도 있는데 수목원 입구에 그게 그대로 있었다. 원래의 지형지물을 이용한 것이다.
수목원을 철길이 감싸고(?) 있는 구조다. 철길을 따라 쭉 걸을 수 있다. 생각보다 길어서 끝까지는 못 갔지만 노래 들으며 걸으니 좋았다. 철길 입구에 세잎클로버가 잔뜩 있는 풀밭을 밟으며 네잎클로버를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 시간만 있으면 끝까지 걸어보고 싶었다.
그나저나 지난달에도 용산에 있는 철길에 다녀왔는데 거기는 실제로 기차가 지나 다니지만 이곳은 기차가 멈춘 지 오래다. 이상하게 기찻길에는 향수를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다. 수많은 화물을 싣고 이 길을 지나다녔을 화물열차와 또 이쪽으로 저쪽으로 흘려 다녔을 과거의 사람들. 기찻길에 서면 마치 파노라마처럼 그런 장면들과 감정들이 훅 하고 몰려온다.
서울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유명하지 않은 수목원에서 즐긴 오월 봄날의 산책, 좋았다.
수목원에서 돌아오는 길. 괜히 그 친구에게 한번 더 연락해서 만나자고 할까?라고 망설이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분명 또 까일걸 알면서도 말이다. 봄날에 산책을 하고 나니 이 장소에 오게 해 준 친구가 자연스레 떠올랐겠지. 그저 이 봄날의 두근거리는 마음이 기분 좋음으로 치환돼서 평소라면 하지 못할 일들을 할 용기가 생긴 거겠지. 하지만 지금 물어봐도 친구는 '그럼 여름방학에 보자'라고 하고 또 그렇듯 먼저 연락을 하지 않을거다. 그러니까, 연락은 하지 않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