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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니seny Jan 16. 2021

서쪽에서 온 귀인은 누구인가

우연과 우연이 겹치면?

  (2012년 12월 시점에서 쓴 글입니다.)


     이 시간의 나는 출근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계획대로라면, 나는 11월 말까지만 깔끔하게 근무 후 3년간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마음 정리 국내여행'을 하고 있을 터였다. 윗선에서 후임자를 아직 결정하지 않은 것 같아 불안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지난주에 딱 1주일만 더 나와줄 수 없겠냐는 부탁을 받았다.


     조금 짜증은 났지만 3년간 매달 하던 일이라 이제는 별로 어렵지 않았고 갑자기 내가 빠졌을 때 돌아가는 상황이 불 보듯 뻔한 데다 며칠 더 출근하고 남은 연차를 다 써버리면 공식적으로 12월 말로 퇴직할 수 있었다. 그러면 월급도 한 달 더 받고, 날짜 상으로도 그게 깔끔하겠다 싶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래서 12월임에도 불구하고 출근을 했다.




     오늘 저녁엔 대학교 같은 과 친구이자 동아리 친구인 ㅅㅎ랑 만나기로 했다. ㅅㅎ는 대학교 1학년 때 만난 친구다. 사실 우리는 동아리 선배들이 너희들은 좀 안 친해 보이는 친구인 거 같다고 부를 만큼 이상하게 확 친하지는 않은 관계이다. 그런데도 연락은 끊기지 않고 있다.


     처음 그녀를 만난 건, 신입생이던 2005년 5월 봄날의 버스 안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었는데, 나는 버스에 타서 옆에 앉은 친구에게 푸념을 늘어놓고 있었다.


“우리 학부는 사람이 많아서 친해지기도 어렵고 어쩌고 저쩌고... 그리고 학회도 별로인 것 같아. 진작에 동아리나 들걸 그랬어. 예전에 바이올린 한 적이 있어서 오케스트라 동아리 갈까 말까 망설였는데... 왜 3월 말인가 ㅇㅇ관 5층 로비에서 홍보 같은 것도 하고 그러던데 아쉽다.”


     그때 바로 앞자리에 앉아있던 그녀가 말을 걸었다. 우리 같은 반이지? 하면서 자기가 그 동아리에 가입되어 있으니 원하면 같이 가자고 했다. 그래서 용기를 내서 갈 수 있었다. 그때 동아리엔 이미 ㅅㅎ랑 같은 과의 또 다른 친구 한 명이 가입해 있었는데 아이러니한 건, 학기 중간에 들어간 내가 두 사람보다 더 길게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서로 휴학하고 취업 준비도 하다 보니 학기도 엇갈려서 한동안 연락이 없다가 2010년 5월 말, 우연히 퇴근길 횡단보도 앞에서 마주쳤다. 알고 보니 그녀는 우리 회사랑 5분도 안 떨어진 가까운 곳에 있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심지어 자취방도 근처에 있어서 퇴근하고 집에 가던 길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 해 6월인가 한 번 만났는데 그렇게 사무실이 가까이 있으면서도 점심시간에 밥 한 번을 안 먹었다. 그래도 회사를 그만 두려니 근처에 있는 그녀가 생각났고, 회사 그만두면 또 언제 보겠나 싶어 퇴근하고 저녁을 먹기로 했다.


     그리고 퇴사를 앞두고 있으니 부서 사람들이 따로 밥 먹자고 하는 경우가 있어서 점심마다 여러 사람들과 돌아가며 식사를 했다. 오늘은 ㅇㅇ언니 차례였다. 처음 입사했을 땐 사실 좀 무서웠고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아 괜히 움츠러들곤 했었다.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나랑 성향이 다른 편이라 아마 같은 반에서 만났다면 일 년 내내 서로 거의 말을 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다.


     점심으로 둘이서 맛있는 스테이크 피자를 먹고 있는데 카톡이 왔다. ㄱㅅ이가 동생인 ㄱㅈ이랑 밥 먹으러 왔다면서 시간 되면 잠깐 보자고 한다.


     여기서 ㄱㅅ이라 함은... ㅇㅁ언니 후임으로 들어온 직원으로 내 옆자리에서 6개월간 일을 했었는데 고생이란 고생은 다하고 그만둔 직원이다. 그녀가 입사하자마자 곧 회사 사무실 이전이 있었고 12월이 지나자 결산 때문에 업무가 폭증해 야근을 밥 먹듯이 한 데다 집안 문제와 개인적으로도 힘이 들어서인지 계속 아프다가 그만두었다.


     정말 신기했던 건,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을 구해놓고 그만두었는데 6개월 뒤에 그 직원이 업무가 변경되면서 또 그 자리가 공석이 되어 다시 사람을 구하게 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새로운 직원인 ㄱㅈ이 입사했는데 알고 보니 자기가 ㄱㅅ이의 동생이라고 했다. 본인은 언니가 다녔던 곳인지 모르고 왔다고 했다.


     ㄱㅅ이가 이제 좀 적응할만하니까 그만둔다고 해서 왠지 모르게 약간의 배신감도 들었고 또 옆에 새로 오는 직원은 업무에 대해 잘 모를 테니(아무리 인수인계를 해줘도 시간이 해결해주는 부분도 있을 테니까) 그 부분까지 내가 떠맡을 생각을 하니 짜증도 났었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로 미안한 마음도 있었는데 회사 그만두고는 한 번도 만나질 못해서 점심시간 끝나고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보기로 했다. ㅇㅇ언니에게는 따로 말하지 않고 볼 일이 있다고 하고 쇼핑몰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로 내려가서 ㄱㅅ에게 전화를 했는데 안 받는다. 번호가 변경되었다고? 혼자 막 당황하면서 어디로 가야 하나, 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그녀한테 전화가 왔고 곧바로 저쪽 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반가워, 잘 지내? 등을 묻고 있는데 옆으로 어떤 여자 한 명이 지나갔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되게 익숙한 얼굴이었다.


    ‘여기가 회사 건물하고 연결되어있으니까 회사 사람인가? 근데 누구지?’하며 생각하는데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 하나.


‘혹시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인가? 옆모습이 너무 닮았는데?’


     이미 그분은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일단 가서 아니어도 좋으니 얼굴을 확인하고 물어봐야겠다 싶었다. 얼른 뛰어가서 저기요, 하며 말을 걸었다.


저기요…
혹시 ㅅㅇㅎ 선생님 아니세요?


     정면을 보니 선생님이 맞았고, 내가 졸업한 지 10년이 지났는데도 얼굴이 변함이 없으셨다. 맞다고 하시니 내 이름을 말해야 했다. 성까지 정확히 밝히려다가 또 왠지 모르게 나를 알아주었으면 하는 욕심이 발동해서 성을 빼고 이름만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선생님도 신기하게 나를 기억하고 계셨다. 나는 눈에 잘 띄지 않는 학생이라서 기억을 못 하실 거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여쭤보니 학기 초에 선생님이 아이들을 파악하기 위해 나눠준 자기소개서에 내가 오이를 싫어한다고 써서 냈고 그게 특이해서 기억에 남았다고 하셨다.


     이 선생님은 매년 스승의 날마다 떠올리면서 마음속에 고마움을 간직했던 분인데 이렇게 만나다니 너무 신기했다. 회사 근처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근무하시는데, 올해 발령받아서 오셨다고 했다. 정말이지 너무너무 반가웠다.


     그런데 생각보다 얘기가 길어지면서 아까 오랜만에 만난 회사 동생 ㄱㅅ을 쇼핑몰 한복판에 내팽개치고 온 느낌이 들어 선생님께 꼭 한 번 다시 뵙자고 말씀드리고 연락처를 교환한 후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갔다.


     이미 점심시간인 1시를 훌쩍 넘긴 시각이라 이제 그만 가야 했고 뭔가 예전부터 그녀를 만나면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었는데 선생님을 만난 기쁨 때문인지 다 잊어먹었다. 그래서 ㄱㅅ에게는 제대로 뭔가를 전하지 못한 것 같은 아쉬움이 남은 채로 헤어졌다.


     저녁엔 친구인 ㅅㅎ를 만났다. 뭐하고 지내니, 업무는 어떠니 그러면서 방송국에서 일하는 그녀가 많이 들었을 법한 연예인들은 진짜 많이 보는지도 물어봤다. 내가 왜 퇴사하는지, 퇴사하고 호주 간다 자랑도 살짝 하고, 우리 연애는 못하고 있어서 큰일이네 등등 이야기를 나눴다. 식사가 끝나고 우리는 같은 버스 정류장에서 같은 버스를 탔지만 나는 중간에 내려 그녀와 헤어져 집으로 왔다. 우리는 참 알 수 없는,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인연이다.


     대학교 때 버스에서 ㅅㅎ를 처음 만났던 날, 동아리 MT에 같이 갔던 일, 학교에서 하는 클래식 콘서트를 보러 가자고 해서 그녀와 그녀가 아는 선배 한 명과 같이 공연을 봤던 일도 떠오른다. 그 선배와는 나는 전혀 모르는 사이였는데 그 날 그 선배의 첫사랑 이야기를 듣기도 했었다.


     어느 날인가 ㅇㅇ관 지하 로비에서 피아노 치고 있는 나를 발견한 그녀가 와서 악보도 없이 가요 반주를 쳐내는 걸 보고 이 친구는 진짜 못하는 게 없구나, 너무 부럽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 날 아침에 엄마가 신문에 각 띠마다 나오는 ‘오늘의 운세’ 중 나에게 해당하는 내용을 보내주셨다. 엄마가 보내준 호랑이띠 오늘의 운세는 ‘서쪽에서 귀인이 나타난다’란다.


     주로 만나는 사람만 만나고 행동반경도 좁은 내가 오늘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사람과 평소에 잘 만나지도 않는 사람을 세 명이나-ㅅㅇㅎ선생님, 회사 동생 ㄱㅅ, 친구 ㅅㅎ- 만났는데, 그중에서 과연 서쪽에서 온 귀인은 누구일지 궁금해진다.




후일담.


     ㅅㅇㅎ선생님은 바로 며칠 뒤에 따로 만나서 식사를 하며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 ㅅㅎ는 그 뒤로도 보지 못하다 몇 년 전 그녀의 결혼식에 참석한 이후로는 사실 연락도, 만나지도 않는다. 친구는 결혼식에 나를 초대하면서도 평소에 자주 연락하지 못해 결혼식에 부르는 게 망설여졌지만 그래도 초대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만약 내가 결혼했어도 그녀에게 똑같이 그런 대사를 할 것 같아서 그 마음이 이해되었다. 우리는 그 정도의 사이는 되는 것이다. 그래서 초대를 해준 그녀의 마음이 고마웠다.


     그리고 삶의 경로가 달라져버린 ㄱㅅ, ㄱㅈ자매는 그 뒤로 더 이상 만나지도, 연락을 하지도 않았다.


     이게 2012년 12월의 일인데 여태까지 서쪽에서 온 귀인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누군가의 귀인이 되는 게 더 빠를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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