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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후 네 번째 맞는 크리스마스 (하)

<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을 보며 미래의 내 모습 생각하기

by 세니seny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원팬파스타가 한참 끓고 있을 때 감바스를 시작했다. 감바스가 원팬파스타보다 완성되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완성되는 시간을 얼추 맞추려고 그렇게 했다.


밀키트에 들어있는 빵을 먼저 꺼내서 레인지에 돌린 다음 썰려고 했더니 칼이 안 든다. 빵이 질긴 건가? 그냥 이빨로 뜯어먹자 하고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나머지 감바스 포장을 뜯어서 원팬 파스타를 만들고 있는 옆 프라이팬에 풀어서 그대로 익히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그동안 파스타는 다 졸아서 엄청나게 꾸덕꾸덕해져 있었다. 일단 불을 꺼서 접시에 덜어놓는데… 아뿔싸, 인터넷에 올라온 파스타 사진에 나오는 것처럼 접시에 다소곳이, 예쁘게 담겨 있으려면 면을 집게로 덜어서 놔야 하는데 프라이팬 채로 그릇에 부었더니 모양은 망. 참고로 맛은 아까 간을 본다고 소스를 살짝 먹어봤는데 개존맛!!!이었다. 이번에야 말로 성공이다. 감바스는 조금 더 데워서 접시에 덜었다.


푸짐한 한 상, 인증샷. (2024.12)


준비를 다 마치고 인증샷 착착 찍고 먹으려고 봤더니 파스타 소스가 꾸덕해져서 면이 서로 붙어버렸다. 국물이 없어. 하지만 대존맛…! 앞으로 크림파스타는 어떻게 하면 되는지 방법을 깨달았다.


나 같은 요리똥손도 원팬파스타를 10번쯤 했더니 이제야 원리를 알게 되는 거구나. 그러면 다른 요리도 한 10번 이상씩은 해봐야 손에 익는 거구나, 하는 깨달음도 함께.


화이트 와인은 와인 설명에 달다고 쓰여있어서 쓴 거보다 낫겠지 해서 샀는데 실제로도 달았다(ㅋ). 계속 먹으니 좀 질린다. 그래도 파스타와 감바스를 안주삼아 홀짝홀짝 마신다. 술이 술을 마신다.


직접 만든 크리스마스 만찬을 먹으며 일본 드라마 <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 특별편을 봤다. 중간에 이런 뉘앙스의 대사가 나오더라. 오히려 꿈이라고 생각해서, 꿈을 이뤘다고 생각해서 그게 끝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실제로 해보니까 달랐다는 것.


주인공인 에츠코가 처음엔 억지로 시작하게 됐던 교열 업무가 의외로 본인에게 잘 맞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그래도 꿈이었던 패션잡지 <랏시>의 편집부로 이동해서 특유의 센스와 열정으로 부편집장 자리 제안도 받지만 거절한다. 그런 와중에 마침 교열부에 잡지 교열 업무가 신설되어서 그쪽으로 이동하게 되는 행운이...!


나도 직업을 바꾸는 중이라 이런 상황이 남 일 같지 않다. 에츠코와 나와 다른 점은 나는 과거에 하던 일을 그렇게 잘 맞는 일이라고 생각지 않아서 이번에 새로운 길로 가고자 하는 거다.


꿈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직접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환상에 덤비는 것일 수 있다. 환상으로 생각했던 일에 덴다면 더 크게 좌절할 수도 있어서 꿈을 이루지 않고 좌절하는 것보다 더 힘들다.


그동안 꿈이라고 생각해 오면서 자기 멋대로 그린 이미지가 있겠지. 그리고 그 꿈을 위해 시간과 돈도 투자했겠지. 그러니까 오히려 그 꿈을 이뤘다고 생각했을 때 기쁠 수도 있지만 어라? 이게 맞나? 싶을 수도 있다는 거다.


그래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꿈이라기보다는 내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러면서도 흥미가 있는 쪽을 찾아가게 된 것이다.


통/번역가 수준의 외국어 능력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나 일정 정도의 외국어 능력을 기반으로 하는 일이라고 했을 때, 내가 이걸 못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더 잘하고 싶어서 악바리처럼 매달릴 수 있는 일. 거기에 가능성을 걸고 시작한 거다.




이렇게 혼자서 맞는 네 번째 크리스마스도 지나갔다.


여전히 크리스마스 요리 전체를 혼자 스스로 요리해내진 못했지만(감바스는 밀키트니까...ㅋ) 적어도 즉흥적으로 메뉴를 생각해 내서 내가 생각해도 간이 잘 돼서 맛있다고 느낄 정도의 요리를 해냈다. 그거면 된 거 아닐까. 작년의 바람과 달리 여전히 혼자이긴 해도.


내년 크리스마스는 아마도 이 집이 아닌 다른 어딘가에서 보내겠지. 그래서 이게 이 집에서 보내는 마지막 크리스마스다. 내년의 크리스마스가 있다는 사실은 사람을 기대하게 만든다. 그때는 이번에 이루지 못했던 소망들이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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