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고 주말에 일하러 가는 대신 평일에 쉰다.
이것엔 나름의 장점이 있는데... 바로 평일엔 뭘 해도 사람들이 붐비지 않고 여유롭다는 것. 그리고 의외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된다. 왜냐? 평일을 여유 있게 보내고 나서 다음날 바로 출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쉰다고 긴장을 풀고 늦잠을 자버리면 그날 밤에 늦게 잠들게 되고 다음날 아침이 힘들어진다. 그래서 평일은 쉬는 날이어도 적당한 시간에 기상해야 한다. 다음날 출근한다는 자체만으로도 몸에 긴장감이 든다. 그래서 토/일을 붙여서 쉴 때처럼 늦잠 자거나 시간 낭비를 안 하게 된다. 그리고 나 빼고 나머지는 대체로 일하는 평일이기 때문 쉬는 것에도 스스로 눈치가 보인다.
오늘은 평일 휴무일이었다. 이제 이사 날짜는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이사 비용을 아끼기 위해 포장이사업체가 아닌 용달트럭 두대를 불렀기 때문에 웬만한 짐은 내가 다 싸둬야 한. 그리고 트럭에 큰 가구들이 들어가고 짐 조금 싣고 나면 나머지 짐을 실을 자리는 없어 보여서 쉬는 날 미리 짐을 싸서 야금야금 본가에 가져다 놓고 있다.
아침부터 짐을 싸서 점심 일찍 먹고 후다닥 가서 짐 풀어놓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마저 짐을 싼다. 그러고 났더니 어느새 오후 다섯 시. 배는 고픈데 저녁 먹기는 살짝 이른 시간.
오늘 날씨가 너무 좋았는데 하루 종일 집에 처박혀서 짐만 쌌고 이곳에 머물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아쉬운 마음을 달래려 오랜만에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옷을 가볍게 입고 줄 이어폰과 핸드폰을 들고 길을 나선다. 약 한 시간 정도 걸리는 코스가 있는데 딱 그만큼만 걷고 돌아와야지, 하며 집을 나섰다.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걷는다. 캬아.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오월말. 곧 유월이 다가오지만 세상은 아직도 초봄의 연둣빛으로 가득하다. 햇살은 강해졌지만 산들바람이 불어서 걷기 딱 좋다. 정말 좋다. 바람결에 풀들이 살랑살랑 저항 없이 흔들린다. 절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걷고 있는데 이어폰 너머로 쿠르릉 쾅쾅, 이라는 소리가 들린다. 이거 잘못 들은 거겠지? 날이 이렇게 좋은데 천둥번개가 친다고? 그런데 자꾸만 그 소리가 이어폰을 뚫고 들어온다. 수상쩍다.
그렇게 맑았던 하늘에 내 뒤 쪽으로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아닐 거야 아닐 거야. 나는 먹구름 무리로부터 달아나려고 필사적으로 걷는다. 그런데도 먹구름은 계속 내 머리 위에 있다. 또다시 쿠르릉 쾅쾅. 이 소리는 마치 내가 뭐 잘못 먹고 배탈이 났을 때 뱃속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처럼 심하게 하늘을 울린다.
그렇게 한 5분을 걸었을까. 저 앞에 다리가 보인다. 이렇게 맑은데 설마? 라지만 만약 비가 온다면 저 다리 밑으로 피신하면 된다.
정말 타이밍 좋게 다리에 도착할 때쯤부터 빗방울이 바닥에 툭툭 떨어지면서 산발적으로 원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리밑에 들어온 지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무섭게 비가 쏟아졌다. 한 시간 안에 정해진 코스만 걷고 가려고 했는데 비가 쏟아지는 지금은 다리밑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세잎(safe)- 이다.
동네에서의 마지막 산책이 갑자기 내린 폭우로 인해 비에 흠뻑 젖어 덜덜 떨며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가는 장면이 될 뻔했는데 정말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안착한 다리 밑에서 망중한의 시간을 즐겼다. 그리고 이렇게 내리는 비가 으레 그러하듯 얼마 지나지 않아 비는 말끔하게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