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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일하기 싫어 아침에 당일 휴가를 내다 (하)

일이 진-짜 하기 싫어서 그런데... 휴가 좀 쓰겠습니다?

by 세니seny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이 모든 얼떨떨한 상황을 정리하고 출근하면서 전화 온 내역과 문자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어라 그런데 이 배송기사 아저씨? 3년 전에 본가가 이사를 해서 가구를 왕창 구입했을 때도 우리 집에 왔다가신 분인가 보다. 오늘 온 문자 위쪽으로 3년 전에 받았던 배송문자가 아직도 남아있었다.


3년이 지나는 시간 동안 나는 독립을 했고 이사를 두 번이나 치렀다. 배송기사 아저씨는 여전히 이 구역 배송기사로서 열심히 가구를 나르셨겠지. 우리는 길거리에서, 동네 마트에서 지나가도 누가 누군지 전혀 모를 사이. 하지만 세상 일이 씨실과 날실이 얽히듯 얽혀있음을 이럴 때 느낀다.


팀장님한테도 가구 배송 와서 물건 받고 오느라 좀 늦을 수 있다고 미리 말해놨는데 겨우 1분 늦었다. 그냥 말하지 말걸. 이럴 거면 그냥 오늘 하루 전체를 휴가 낼 걸 그랬다. 출근해서 오전에 일은 좀 마무리하고 오후반차는 (예정대로) 냈다. 팀장님께는 솔직히 말씀드릴까 했다.


팀장님,
제가 오늘...
일이 진-짜 하기 싫어서 그런데

오후에 휴가 좀 쓰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팀장님이 열려있는 분이라 해도 이건 좀 선을 넘는 것 같아 살짝 거짓말을 했다. '오후에 가구가 배송 온다고 해서 휴가 좀 내겠습니다.'


오늘 가구 받을(이미 받은) 건 사실이었고 + 받을 거라고 전화받은 것 때문에 휴가를 내려고 했던 게 사실이니까. 그리고 이런 마음으로 사무실에 앉아서 일하는 게 더 지옥이니 이건 서로에게 윈윈이에요.


그럼 휴가를 내고 뭘 할까?


얼마 전 영화 어플을 검색하다 보고 싶은 영화가 있어 시간표를 봤지만 내가 좋아하는 영화의 특성상(주로 독립영화, 인디영화, 해외영화 위주) 죄다 보기 어려운 시간에 포진해 있다. 그러다 평일 시간표 들춰봤던 게 생각나서 다시 보니까 있다! 있어! 오후 반차내고 가서 볼 만한 시간이. 그래서 영화나 보고 집으로 가기로 했다.


회색빛 하늘에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어서 원래 생각했던 자전거 타기는 별로여서 다음에 타기로 했다. 내가 자전거를 타는 이유 중 9할은 풍광이 이쁜걸 눈에 담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즉 날이 좋거나 햇살이 좋거나 하늘이 이뻐야 한다. 밤에 타는 자전거는 도시의 밤 풍경 보기 위함이니 낮의 날씨와는 조건이 다르다.


오전 업무시간이 끝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사무실을 나온다. 그리고 예매해 둔 영화를 보러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그런데 이 버스 타러 가는 길, 너무 익숙하다. 이사하기 전에 살던 예전 동네로 가는 코스랑 길이 겹친다.


헤어진 전 남친도 아니고 무슨 청승을 떠는지 모르겠다. 당분간은 옛날에 살던 동네가 생각날 만한 단서가 있거나 그 근처를 간다던지 그런 일을 피해야겠다. 쓸데없이 감상적이 됐네. 게다가 하필 오늘 날씨도 구질구질하다. 비도 안 오는데 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씨. 미련 있는 구질구질한 헤어진 구 여친 포지션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꽤 괜찮은 동네에서 상대적으로 안 좋은 곳으로 이사를 한다는 건 이런 느낌인 거다. 조건이 아주 괜찮은 구 남친과 헤어졌는데, 걔는 다시 연애를 시작했음을 화려하게 공표했고 솔로인 내가 그걸 봤을 때의 기분 같은 느낌이랄까. 아마 연애를 해보면 또 다른 식으로 표현하겠지. 좀 더 원초적이고 사람 한 명 개쓰레기로 만드는 비유를 써내는 건 일도 아니겠지.


나는 정말로 일이 하기 싫어서, 당일 반차를 내고 프랑스 영화를 보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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