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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바르셀로나 해변에서 요가하기

우크라이나 친구 밀라Milla와의 대화

by 세니seny

그 뒤로도 수업은 계속되었다. 중간에 우르르 쾅쾅, 하는 소리가 나서 뭔가 했는데 누워서 보니 왼편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일주일 전만 해도 오늘 비 예보가 있어서 걱정했었는데 수업이 다 끝날 때쯤 진짜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명상 타임. 바로 눈앞의 수평선도 보고 왼편으로 고개를 돌려 이미 떠오른 해도 보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먹구름도 지긋이 쳐다봤다. 그러면서 왜 우리나라도 명상이나 요가 수업 마지막 즈음에 선생님이 좋은 말 해주잖아? 눈앞에 뭘 그려보세요, 마음을 들여다보세요, 와 같은 말들. 정확한 멘트는 잊어버렸지만 이곳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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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하는 우리들. 나와 케이틀린의 모습도 살짝 보인다. (@바르셀로나, 2024.05)


내가 눈을 좀 오래 감고 떠서 그런 걸까.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바로 내 앞에 앉은 여자애가 진한 핑크(자주색) 레깅스를 입고 왔는데 그거 때문인지 눈앞에 자주색 잔상이 펼쳐지면서 곧 그 잔상들이 하트처럼 보이는 현상이 이어졌다. 나, 하트가 고픈가 봐.


다행히 비도 거의 그치고 수업도 얼추 끝났다. 수영이 뭔지 궁금했는데 내 바로 옆자리에서 같이 요가를 했던 키가 크고 늘씬한 우크라이나 미녀 밀라가 설명해 줬다. 바다에서 본격적인 수영을 하는 것은 아니고 입수나 냉수마찰 같은 느낌으로 몸만 살짝 담그고 나오는 거라고. 그래서 수영은 안 하고 이후의 커피 타임만 참여하기로 했다.


밀라를 따라 휴가 차 미국에서 온 케이틀린과-동양애인데 내 베프 SH와 너무너무 똑 닮아서 괜스레 편하게 느껴졌다-먼저 카페에 가 있기로 했다. 매번 모임이 끝나고 가는 곳인 듯했다. 먼저 주문해 놓고 수다 떨기.


나는 이런 상황에서 무슨 얘길 해야 될지 잘 몰라서 쭈뼛거리고 있는데 역시 미국에서 온 친구는 스몰톡의 강자다.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나중에 수영 갔던 사람들도 다 와서 카페에 둘러앉아서는 각자 먹을 빵과 커피를 시켰다.


밀라는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스페인에 와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 가족들이 우크라이나에 남아 있어서 가끔 가는 모양으로 이번 주 주말에 가서 한 달 정도 있다 온다고 했다. 전쟁 때문에 자기가 아는 사람이 셋이나 죽었고 자기는 러시아어를 듣고 쓰고 말하고 이해할 수 있지만 가능하면 사용하지 않으려고, 러시아어로 된 음악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것들이 러시아에 힘을 실어주는 거 같다면서. 전쟁 전에는 러시아에 대해 중립이었는데 자기 주변 사람들이 죽고 나서는 확실히 마음이 기울었다고 했다.


그리고 여자들도 전선으로 나갈지도 모른단다.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어서 병원 문제 등도 얽혀 있는 듯했다. 오늘 모임에 온 사람 중에 다른 테이블에도 우크라이나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는데 그 사람은 가족들하고 스페인에서 같이 지내는 듯했다. 뉴스에서만 보던 뉴스를 직접 당사자에게 들으니 신선하면서도 더 가까운 일처럼 느껴졌다.


옆자리에 앉은 케이틀린에게는 마드리드 여행정보를 알려주길래 나도 슬쩍 같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일일 참가자인 나와 케이틀린에게 그다지 따뜻하지 않았는데 밀라는 자기도 이방인이라 그런가 우리에게 상당히 우호적이었고 나와 케이틀린을 챙겨주었다.


다들 이야기를 나누고 간단히 아침을 먹은 뒤 헤어질 시간. 오늘 직접 우크라이나에 대한 이야길 들을 수 있어 고마웠다고, 한국에서도 과거에 전쟁이 있었기 때문에 너의 어려움에 대해 이해한다고, 꼭 전쟁이 얼른 끝났으면 좋겠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저 어깨를 한 번 토닥여주고 헤어졌다.


뒤늦게 나온 크로와상을 들고 다 같이 찍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린다고 해서 내 인스타 아이디를 알려주었고 분명 태그한다고 했는데... 나한테 메시지가 안 오는 걸 보니 아이디를 잘못 쓴 건가? 아무튼 태그 되면 개인 메시지를 보내주려고 했는데 아쉬웠다.


나는 'Should have p.p'인간이다. 뭔 뜻이냐고? 항상 '뭐 뭐 할 걸…'을 중얼거리는 일명 '껄'무새 인간. 특히 말하는 상황에 닥치면 더 그렇다.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매우 기억에 남았다. 내가 살고 있는 서울에서도 이런 모임을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전혀 접점이 없는 사람들끼리 공통의 활동을 하고 가볍게 식사나 차를 하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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