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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6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순례자의 길을 걸어보다

누군가 나에게 포르투갈어로 시간을 물어보았다

by 세니seny

순례길에서 만난 현지인과의 소소한 에피소드 하나.


현지인 아저씨의 사진은 안타깝게도(?) 없지만... 이런 길에서 만났다. (@리스본, 2024.06)

아까부터 내 앞에서 웃통을 까고 걸어가시는 할아버지에 가까운 아저씨 한 분이 있었다. 보려고 본 게 아니라 웃통을 다 벗어 재끼셔서 눈에 보이니까 봤는데 진짜 뱃살이 하나도 없고 구릿빛에 몸도 탄탄하고 건강해 보였다. 아무튼 이 분은 나를 앞질러 갔다가 다시 되돌아가시는지 돌아오는 길에 나랑 다시 마주쳤다.


그런데 날 보면서 알 수 없는 말로 뭐라 뭐라 하는 거다. 보통 이렇게 외국의 길거리에서 나 같은 외국인을 보고 먼저 말을 걸어오는 경우는 두 가지 아니 세 가지 정도 경우의 수가 있다.


1. 그냥 신기해서 말 걸어보기
2. 앞뒤 없이 드립따 욕하기
3.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편견 없이 무언가 물어보기


나는 그중 3번에 당첨되었다. 아저씨는 정확히 입으로 "Horas" (시간)이라고 하면서 손목에 시계를 가리키는 제스처를 했다. 물론 포어 단어를 못 알아 들어도 저 제스처만 보고도 시간 물어보는구나~ 했겠지.


하지만 지난 일주일 간 포어를 배운 짬이 있는 사람으로서 'horas'라는 단어를 알아들었다는 기쁨이 컸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월요일이니까 지난주에 같은 수업 들었던 친구들 중 다음 코스를 이어서 듣는 친구들은 수업 중이겠구나. 나 빼고 거의 다 계속 수업을 듣는 것 같던데.


심지어 웃긴 건… 지난주 수업시간에 시간을 말하는 것까지도(!) 배웠다는 사실. 그러니까 나는 수업시간에 배운 대로 대답을 해주면 된다. 그런데 어버버 하다가 멍충하게 핸드폰을 내밀어서 시간을 보여주고 말았다. 아저씨는 쿨하게 "Obrigado"하고 떠났고 나는 뒤늦게서야 "Onze horas e cinqunta e cinco"라고 소리 내어 말해보았다.


외국어를 배울 땐 기초 단계에서 꼭 시간을 묻고 답하는 표현을 배운다.


하지만 요즘은 핸드폰은 기본에 애플워치까지 차고 있어서 길에서 시간 물어보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거의 없다.) 그래서 시간 묻고 답하기를 굳이 배울 필요가 있나? 싶다.


그래서 오히려 이렇게 시간을 물어보는 경우, 이걸로 말을 터서 뭔가를 해보려는 사기꾼이 아닌지 의심해야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이 할저씨는 진짜 찐 현지인인지 핸드폰도 시계도 아무것도 안 들고 나와서 운동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저 시간이 궁금했던 거다. 그것도 외국인인 나랑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외국인인데도 나한테 말을 걸어서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가만 보니 이것 또한 편견이구나. 유럽에는 동양계처럼 보여도 여기서 태어나서 산 사람들도 많다. 즉 외모만 가지고 이 사람이 현지어를 못하겠구나,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차별이 될 수 있다. 그러니까 오히려 아저씨는 편견 없이 나에게 말을 걸어준 거다.


아무튼 이 길을 지나다니는 다른 현지인도 있는데 앞으로 구르고 뒤로 구르고 누가 봐도 외국인인 나에게 하지만 포어를 일주일 정도 배워 마침 관심을 갖고 있는 나에게 마침 또 내가 대답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물어봐준(?) 것이다. 재밌는 경험이었다.

혹여나 포르투갈을 떠나기 전에 누군가 또 시간을 물어본다면 그때는 더듬 더듬이라도 꼭 포어로 대답해 봐야지.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벽화가 그려진 구간도 있었다. 외롭다. 힝. (@리스본, 202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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