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P3에서 랜덤으로 흘러나온 노래로 여행을 마무리하다
오전만 해도 먹구름이 끼어 있었는데 어느새 걷히고 아주 맑은 날씨가 되었다. 기분이 좋다.
버스는 생각보다 오래 기다리지 않고 탔다. 아아를 마셨음에도 오늘 새벽에 일찍 깬 데다 술까지 한 잔 했더니 졸려서 반쯤은 꾸벅꾸벅한 상태로 시내까지 나왔다. 어느새 창문 밖에 나타난 코메르시우 광장은 파란 하늘을 담고 있었다. 비눗방울 아저씨가 와서 분위기가 예술이었는데 잠이 덜 깨서 멍 때리다 내릴 생각을 못하고 지나쳤다. 원래대로 다음 정류장에서 하차.
알고 보니 여기가 그 뉴진스 뮤비 찍은 그 주제 사라마구 박물관 앞이었다. 여길 처음 온 날은 좀 흐렸었는데 오늘은 날씨가 아주 맑아서 뮤비에서 본 색감이 나온다. 이대로 숙소에 돌아가기엔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조금만 더 산책하고 가야지.
오늘 여행은 핸드폰 데이터가 안 되다 보니 제약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실시간으로 마음에 드는, 머릿속에 바로 떠오르는 음악을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을 준비하다 혹시 몰라 챙겼던 MP3를 여행 마지막 날에 알차게 써먹었다.
어떤 노래를 들을까 망설이다 정말 오랜만에 듣는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 딱인 러브홀릭의 <run>을 발견했다. 이어지는 오늘 오후의 플레이리스트는 완벽했다.
멋진 말들로 꾸며댈수록
나의 마음을 가릴 것 같아
빼고 또 빼고 줄여갈수록
보석과도 같이 남아있는 이 한마디
좋다
사랑해서 좋다
다른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 기분
<좋다>, 데이브레이크
Run
고민할 것 없어
달려 우주까지
Feel
너의 특별한 색깔
Hide
버리지 못했던
어설픈 욕심들
Keep
너의 신비한 미소
느껴지니 새로
보게 될 너의 세상
보이잖니 너의
우뚝 선 모습 어때..?
이제 너의 두발은
구름을 밟는다
And run
never mind
And run
And you run
<run>, 러브홀릭
예쁜 수첩과 펜을 준비한다
볕이 잘 드는 카페를 찾아서
가져갈 책과 음악을 적는다
빼놓지 말아야 할 편한 플랫 슈즈
너와 함께 지도에 색칠한다
두근두근 내 맘도 무지개 빛
보사노바 리듬 우릴 감싼다
손에 쥔 티켓과 행복한 상상
(중략)
언젠가 뒤돌아보면
제일 행복한 순간 지금일 거야
그대여 저길 봐요 나를 봐요
하나 둘 셋
<bon voyage>, 토이 (feat. 조원선)
노래를 더 듣고 싶지만 돌아가야 한다. 아쉬운 마음으로 체크아웃 후 맡겨둔 짐을 찾아 공항으로 가기 위해 터덜터덜 숙소로 돌아간다. 지금은 짐이 없으니 가볍지만 이따 배낭과 캐리어를 이고 지고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릴 생각을 하니 끔찍하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이,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할 만하다.
숙소에서 짐을 찾고 나오기 전, 와이파이로 다시 한번 공항 가는 길을 파악한다. 좋았어. 항상 걸었던 길 대신 어제 쌀국수 먹으러 갔던 비교적 평평한 길로 가보기로 했다. 큰 대로변 길은 경사가 심해서 짐을 들고 이동하기가 불편했는데 대로변 안쪽에 나 있는 길은 똑같은 방향으로 가는 건데도 평탄했다.
그나마 평평한 길에서 짐을 끄니 좀 낫다. 지하철역에 금방 도착해서 낑낑거리며 가방을 들고 내리고 이제 마지막이 될 리스본 지하철을 탔다. 데이터가 먹통이라 유튜브 같이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쓰는 건 못하지만 핸드폰에 미리 다운로드를 하여둔 전자책은 볼 수 있다. 할 것도 없으니 읽다 만 페소아 시집이나 읽어야지 했는데 왜 이렇게 잘 읽힌담.
관광 일정은 끝났지만 아직 이 여행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으니 이 모든 과정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다 읽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페소아의 시를 전자책으로 읽으며 공항에 도착했다.
4년 반 만에 온 유럽대륙에서 꽉 채워 두 달을 보내고 이곳을 떠난다. 다음에 언제 와서 남은 동전을 쓸 수 있을까?
하지만 인천공항에 도착하기 전까지, 이 여정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