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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포르투갈 소도시, 코스타 노바에서 생긴 일

우연히 들른 바닷가에서 사구를 만나다

by 세니seny

다행히 해변까지는 골목 하나만 건너면 바로였다. 분명 안내소에서 설명 들을 때만 해도 데크길도 가야지~ 했는데 줄무늬 집에 집착한 나머지 완전히 까먹고 있었던 거다.



약간 언덕진 나무길을 올라가니 세상에- 내 눈앞에 바다가, 파도치는 바다가, 곱디고운 모래와 함께 펼쳐져 있었다. 그래, 이건 작지만 분명 사구(砂丘)야. 내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사구. 예상치도 못하게 여기서 만나는구나. 못 보고 갈 뻔했는데 막판에 마음 바꿔서 이렇게 보고 가는구나.


혼자 감격의 도가니탕에 빠졌다. 이러다 진짜 커다란 본격적인 사구에 가면 더 감동받겠지만 지금은 이걸로도 충분하다. 데크길이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전체 길이는 모르겠다) 일단 왼쪽부터 가보기로 했다.


크...
너무 좋아!
멋있어!!!!


마침 해도 나기 시작하면서... 주위가 밝아졌다. (@코스타 노바, 2024.06)


이런 멋대가리 없는 단순한 말로 내 심경을 표현해서 그렇지만 사실이었다. 풍경을 바라보며 기록을 하다 이 아까운 시간을 핸드폰 화면만 볼 순 없지 하며 중단.


그럼 이 풍경 앞에서 무슨 노래를 들을까 했는데 사구 앞에서 들을 수 있는 건 어쩔 수 없이 가을방학의 <3월의 마른모래>뿐. 가을방학의 음악은 작곡가 정바비와 관련된 일련의 성추문 이후로 모래처럼 꺼끌꺼끌한 기분이 들어 거의 듣지 않게 되었지만 이번엔 어쩔 수 없었다.


그러고 나니 드는 생각. 다음 버스 말고 다다음 버스를 탈까? 그럼 음악도 듣고 이 풍경을 질리도록, 까진 아니더라도 아주 충분히, 실-컷, 마음껏 감상할 수 있을 텐데.


그런데 버스 시간표를 보니 다섯 시대는 아예 차가 없고 다음 차는 18시 10분이다. 문제는 이 편을 타면 7시에 문을 닫는 짐 보관소에 시간 맞춰 도착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결국 보관해 놓은 짐 문제 때문에 원래대로 다음 버스를 타기로 한다.


이왕 가져온 미니 삼각대로-여행 중에는 무거워서 웬만하면 잘 안 가지고 다닌다-전신샷이나 찍자 싶어서 남은 시간 쪼개어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아쉽지만 여유 있게 음악은 듣지 못하고 오른쪽 데크길까지 좀 더 걸어보고 버스시간에 맞춰 나왔다.


버스 타고 아베이루로 돌아오는 길. 깜박 잠들었다 깼는데 딱 시내에 있던 버스 정류장이다. 화들짝 놀라 버스에서 내렸다. 잠이 들었다가도 내릴 정류장이나 역에 도착하면 잠이 깨는 이 능력은 서울 지하철에서만 발동되는 게 아닌 그저 인간의 본능인 걸까? 여기서 내리지 않으면 터미널에서 한참을 걸어와야 했기 때문에 다행이었다.


짐을 찾아서 숙소로 갔다. 건물 입구에 들어가니 유럽 답게 엘리베이터는 당연히 없다. 한숨 쉬고 있는데 뒤에서 통화하면서 들어오던 흑인 남자애가 도와줄까? 하는 거다.


평소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자,는 주의로 내가 할 수 있으면 도움을 받지 않는 편이지만 유럽 와서 짐 들어준다는 건 절대 거절하지 않는다. 유럽에 며칠만 있다 보면 이게 무슨 말인지 깨닫게 된다. 숙박객인지 여기 사는 앤지 모르겠지만 그 친구는 내 짐을 내려주고도 한 층 더 올라갔다. 투숙객은 아니고 건물 관리인? 주민? 아무튼 고마웠다.


씻고 나와서 부엌 겸 라운지에서 다이어리를 정리하고 있는데 동양계로 보이는 친구가 살며시 말을 걸어왔다. 그래서 말을 트다 보니 부모님이 베트남 사람인데 본인은 독일에서 나고 자랐다고 했다.


언제나 그렇듯 여행 얘기를 하다가 한국의 업무환경(주 40시간이라니 엄청 놀람 ㅇ.ㅇ)과 유럽은 어떻냐 등 얘기하다가 그 친구가 저녁으로 먹으려고 만든 파스타가 다 식어버렸다. 그래서 얼른 저녁 먹으라고 하고 나도 다이어리 정리를 시작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각자 할 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저렴한 숙소답게 문을 열자마자 침대가 바로 눈앞에 있으며 화장실 샤워부스는 청소를 제대로 안 해서 그런지 물만 뿌렸는데도 물이 그대로 차올라서 식겁했다.


하지만 부엌에서 다른 숙박객은 아무도 없이 오로지 나와 너, 단 둘이 만나 서로 이름도 묻지 않고 대화를 나눴다. 그 시간은 기묘하면서도 즐거웠다. 그래서 이 숙소에 대한 불만은 이 친구와의 만남이 가져다준 우연과 기쁨으로 퉁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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