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또다시 이사

마지막 동네 산책 : 부동산에 들르고 도서관에 가기

by 세니seny

전세권 설정 해제 서류를 찾다가 2년 전에 받은 부동산 계약서 파일을 열어보니 부동산 이름이 써진 작은 봉투가 하나 있었다. 살짝 묵직했는데 열어 보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방 열쇠들이 들어 있었다. 내가 계약할 때 받은 거니까 그대로 다음 세입자에게 전달해줘야 한다. 잔금날 음식물쓰레기 카드와 함께 전달하기로 해서 부동산에 맡겨놓기로 미리 얘기해 놨다.


부동산에 들어가 인사를 하고 열쇠 꾸러미를 전달한다. 그리고 잔금 수령 시 서로 주고받을 영수증에 미리 사인을 해둔다. 이걸로 내가 할 일은 정말로 끝.


여기서도 밉상 부동산 중개인 아주머니는 '아이고~ 이 열쇠 어차피 쓰지도 않으니 버릴까?'라는 말을 왜 나한테 하는 걸까? 어쨌든 나는 받은 대로 전달할 의무가 있는데 말이지. 그러면서 집주인이 계약금을 안 내려서 힘들었는데 겨우겨우 계약이 됐다는 둥 주절주절 말을 꺼낸다.


'아니, 중간에서 뭐 하시냐고요. 당신도 수수료 더 받아먹으려고 집주인 제대로 구슬리지도 못했으면서. 그 역할하라고 세워두는 건데'(와 같은 말은 마음속으로만 하고 가만히 있었다). 집주인은 당연히 계약금을 조금이라도 더 올려 받고 싶어 하고 나는 내 돈만 받고 나가고 싶어 하면 중간에서 잘 조율했어야지. 자기가 일을 못해놓고는 왜 이 자리에 없는 집주인 욕을 하는지 ㅎㅎㅎ 그러면 내가 맞장구치고 좋아할 줄 알았나? 참나. 당신이 일 못한 거예요.


그러면서 내가 부모님 댁으로 이사 갔는지 여부는 왜 궁금한데? 알아서 뭐 하게? 그러면 돈을 늦게 돌려줘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분명히 어디로 이사 간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자꾸 만날 때마다 자꾸 부모님 댁으로 들어간 거 아니냐고 캐물어서 찜찜하다.


아무래도 엄마가 전화하면서 귀한 자식이고 내보내기 싫었는데 얘가 독립해서 살아보고 싶다고 해서 내보냈다면서 그러니 뭔가 다시 들어올 여지도 있다는 뉘앙스를 흘린 건지... 아무튼 내가 어디로 가든 알아서 뭐 하시게요. 그냥 다른 데로 이사 갔다고 적당히 둘러댔다. 그렇게 일을 후다닥 마치고 나왔다. 잔금날 마무리까지 하면 다시는 볼 일 없을 사람들.


그리고 목적지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동네 도서관.


원래 이사 가기 전날에 책을 싹 다 반납하려고 했는데 빌린 책을 다 못 읽었다. 그렇다고 안 읽은 책을 반납하기에도 찜찜하고 여러모로 이 동네에 다시 한번 올 일이 있었다. 이삿날은 정신없으니까 이사를 마치고 책을 반납하면서 마지막으로 동네를 찬찬히 둘러보고 싶었다. 나만의 헤어짐 의식이랄까.


그래서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인 도서관으로 향했다. 이제 이 거리를 걷는 것도 마지막이겠지. 일단 빌린 책 4권 중 3권은 반납을 해놓고 아직도 다 읽지 못한 한 권이 남아 있어서 여기서 읽고 반납하기로 했다. 혼자 앉아서 읽을만한 자리가 남아있어서 자리를 잡고 책 읽기 시작했다.


오늘은 월요일이라 박물관이 쉬는 날이니 나에게는 일요일이나 다름없는 날. 마침 내일도 운 좋게 휴무를 얻었기 때문에 연속으로 쉬는 날이다. 다음날도 쉬는 날이니 긴장감이 덜하고 정말 쉰다는 느낌이 든다. 이렇게 도서관에서 책도 읽고 글을 쓰며 시간을 보내고 빌린 책도 전부 다 읽고 깔끔하게 반납했다.


이삿날은 짐을 빼면서 뭔가 잘못되지 않을까, 놓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느라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오늘에서야 2년 간 나의 집이자 동네였던 곳과 느긋하게 걸으며 인사하고 저물어가는 하루를 마무리한다. 나는 오늘도 도서관을 곧바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가방을 들고 짐을 싸매고 나갈 준비를 다 마치고도 미련이 남은 구질구질한 전여친처럼 유령처럼 도서관을 헤매다 나와서 지하철역을 향해 걷는다.


작년 여름 내내 두 달간 유럽여행을 마치고 이 동네로 돌아왔었다. 그때는 집에서 어딜 나가든 외출의 신호로 뉴진스의 <supernatural>을 지겹게 들었었다. 그래서 비슷한 이 계절이 다가오니 자연스레 그 노래가 떠오른다. 마침 지하철역까지 가기에 재생시간이 딱 맞는 좋은 곡이다.


저녁 여섯 시 반쯤의 햇살과 거리. 낮에는 더웠는데 바람이 선선해졌다. 작년 여름엔 저녁에 수영을 다녔기 때문에 하늘이 이런 느낌일 때 즘 수영 가방을 들고 수영장으로 가는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으며 꼭 <supernatural>을 첫 곡으로 들었었다. 일 년 전의 과거가 불러져 온다.


노래가 끝나면서 지하철역 입구에 도착했고 나는 동네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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