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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적운 Mar 18. 2021

농인의 이름, 얼굴 이름

청인들끼리 처음 만난 사람과 인사를 할 때는 인삿말을 건네고, 자기소개를 하면서 통성명을 합니다.


농인과 처음 만났을 때에도,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ㅇㅇㅇ입니다. " 라고 말하는 것까지는 똑같습니다.

그리고 한 문장이 더 추가되지요.

"얼굴이름은 ㅇㅇㅇ입니다."


이 '얼굴 이름'이 뭘까요?


앞서 말했듯 농인들은 한국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화로 한글 이름을 말해주면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기억을 한다고 해도, '홍길동'이면 '홍동길'로 기억을 하거나 애매하게 비슷한 이름으로 기억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농인들은 '얼굴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한글 이름은 청인 가족이나 관공서, 공적인 자리, 행정문서 등 청인사회에서 사용되지만, 얼굴 이름은 농사회 안에서 사용되는 농인의 또다른 이름인 것이지요.

농문화가 시각 문화이니만큼 보통 외관상에서 드러나는 특징(키, 생김새, 머리 모양, 자주 짓는 표정 등)이나 이름의 한글 지문자를 활용한 수어를 가지고 다양하게 얼굴 이름을 짓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유년기에 농학교 등에서 생긴 이름을 쓰는데, 그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본인이 바꾸기도 합니다.


농학교를 다니지 않았던 사람들도 농사회에서 농인들과 어울리려면 얼굴 이름이 꼭 필요합니다. 수어교실 선생님이나 친한 농인들, 동료들에게 지어달라고 해 보세요. 본인이 직접 지어도 좋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어요. 저희 아버지는 얼굴 이름 짓기의 장인이신데 사람의 특징을 잘 집어내는 데 일가견이 있습니다. 남편을 소개해드렸을 때도 얼굴 이름을 아주 찰떡같이 잘 지어주셨지요.

아버지가 지어주신 제 얼굴 이름은 아래 사진 오른쪽의 동작입니다.

제 명함 뒷면이에요. 앞면은 한국어, 뒷면은 한국수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눈썹을 올리는 여자'라는 표현입니다.

안경을 쓰기 전, 시력이 좋지 않던 시기가 있었어요. 그 때 책을 읽으면 시력이 안좋아서 눈을 크게 뜨고 봐야 하니까, 눈썹 근육이 올라가면서 이마에 주름이 쫙 잡히곤 했었는데 아버지가 그걸 놀리면서 제 이름으로 만들어주셨죠. 어린 맘에는 아버지한테 놀림당하니까 짜증났었어요.

그래도 나이 들면서는 독특한 얼굴 이름인데다가, 저는 안경을 쓰고 있는 지금도 수어를 사용할 때 저 표정을 많이 짓는 편이고, 얼굴 이름에 얽힌 썰도 이야기하기 좋아서 아버지께 감사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얼굴이름을 지을 때의 한 가지 팁을 드리자면, 예쁜 이름일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기억하기 쉬운 이름이 좋습니다.


농인들이 많은 만큼, 얼굴 이름도 정말 다양하게 많이 있거든요. 그러다보면 겹치는 사람도 생기고 헷갈리기도 합니다. 특히 예쁜 모양의 수어 이름은 정말 너~무너무 많이 겹쳐요. 기억하기가 어렵지요.


기억하기 쉬운 이름은 한 눈에 봤을 때 이 사람의 특징을 담았다고 알 수 있는 직관적인 것으로, 얼굴 이름이 만들어진 이유를 설명했을 때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이름입니다.

그러려면 예쁜 이름보다는 사실 익살스럽고 재치있는 이름이 인상적이라 기억에 오래 남지요. 저희 아부지가 이름짓기 장인인 이유도 이 포인트를 정확하게 캐치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 농인과 통성명을 하면서 얼굴 이름을 봤을 때의 팁을 알려드릴게요.

상대방이 얼굴 이름을 알려줄 때, 직접 따라해보고 맞는지 확인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할 때 수형(손 모양)이나 수위(손의 위치), 수동(손 동작의 움직임) 등이 미묘하게 다를 수 있으니 본인에게 직접 확인받으면 나중에 그 사람을 지칭할 때 이름을 잘못 이야기하면서 오는 혼란을 막을 수 있지요.




+

본문에 담지 못한, 이름과 지칭, 호칭에 관련된 농문화에 대해 하나 더 덧붙입니다.


청인 사회에서는 '박 회장님, 김 사장, 이 선생, 최 부장님' 등 성+직함의 호칭과 지칭이 자주 쓰이는 편입니다. 수어에도 김, 이, 박, 최, 문 등 성씨를 지칭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직함의 방식으로 호칭이나 지칭을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3인칭의 지칭일 때에는 얼굴 이름만을 사용하는 사람도 있고, 존칭을 써야 하는 특별한 경우(회사 내부나 공식 석상)에서는 얼굴이름+직함의 형식으로 지칭하기도 합니다.


2인칭으로 호칭할 때도 청인들은 '김 선생님, 이 부장님' 등의 호칭을 사용하지만 농인들은 호칭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주의를 끄는 손짓을 사용하거나, 친밀한 사이일 경우 어깨나 팔뚝을 가볍게 두드리는 식으로 상대방을 부릅니다.


그러니 농인들이 대화 중에 직함을 붙이지 않고 얼굴 이름만 쓰는 경우에도 당황하지 마세요. 특별히 그 대상을 무시해서라기보다는 농문화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다만 청인의 문화에 익숙한 농인들은 직함을 생략했을 때 불쾌해할 수 있으니 지칭을 할 때에는 맥락에 따라 적절히 직함을 붙여 존칭을 사용하는 편이 바람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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