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좀비들의 공허한 눈망울
가상현실 속을 그냥 막 생각나는 대로 거닐다 보니깐 무슨 웹툰(webtoon) 만화처럼 보이는 것 같지만, 참조로 나는 웹툰을 거의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만화처럼 그저 웃픈 장면으로 보면서 애석한 미소만 지어주기에는 뭔가 좀 허전하지 않나. 마치 2% 정도 부족한 감정이 한 방울 남아있는 듯한 그런 어정쩡한 느낌 같은 게 올라오는 것 같은데. 나만 그런가. 만화의 한 장면처럼 쓱 감상하고 스쳐 지나가기에는 오히려 ‘다큐’적인 향기가 스며들어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하거든. 짧은 가상현실 스토리에서 어딘가 모르게 인생의 씁쓸한 맛이 배어 나오는 것 같은 다큐멘터리(documentary)의 느낌이 얼핏 오버랩(overlap) 되는 이런 기분은 뭐지. 그 다큐멘터리 제목은 무엇으로 하면 어울려 보일까.
저런 제목의 콘텐츠를 영상이나 글로 제작하게 된다면, 썸네일 같은 제목 영상이나 첫 표지 또한 어떤 삽화로 하면 어울릴지도 갑자기 확 떠오르는 장면이 있네? 이런 그림은 어떨까.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끼리 자신의 스펙 점수가 적혀 있는 전광판을 머리 위에 빛나는 꽃처럼 꽂은 채로 엄청나게 으리으리한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하고 있다. 서로를 안타깝게 지그시 쳐다보기만 하는 사람들도 있고, 차마 정면으로 볼 수가 없어서 그저 곁눈질로 훔쳐보고만 있는 이들도 있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이들도 있다. 혹은 서로를 있는 힘껏 불러대면서 간절히 애원하는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그들 사이에 철조망이 있어도 거의 바로 앞에 닿을 만큼 가까이 붙어 있는데 애써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모습들도 보인다. 그렇게 각양각색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분명한 공통점으로 보이는 건 다들 너무 애타는 심정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뭔가 사랑에 목마른 사람들처럼. 왜들 저러고 있는 걸까. 무슨 사연들일까. 왜 커다란 철조망이 그 가여운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걸까. 그걸 없애는 방법은 전혀 없는 걸까.
성공 확률이 높은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하다. 자신들의 스펙(spec) 전광판을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해 거기에 표시되어 있는 총점 숫자를 더 높이면 된다. 여러 스펙을 끌어올려서 총점을 높이는 것처럼 플러스(+) 요인을 추가하는 방법이 무엇보다도 제일 좋을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상황이나 전쟁터 같은 검은 환경을 없어지게 하는 것 또한 마이너스(-) 요인이 감소되어 전체 점수를 끌어올리는 방법이 된다. 총점 숫자가 높을수록 더욱 빛나는 후광 효과로 인해 서로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철조망을 녹일 수가 있다. 그 뜨거운 빛의 열기에 의해서 철조망은 녹아서 허물어지게 되고 서로 사랑하는 두 남녀는 그제야 아무런 장벽 없이 눈물겨운 상봉으로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코리안(korean)은 오늘도 자신의 전광판을 더욱 빛내기 위해 열심히 달리면서 뜨거운 경쟁의 도가니로 뛰어든다. 그런 경쟁의 도가니 그릇만이 그 단단한 쇠붙이의 철조망을 뜨겁게 녹여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마치 경쟁에 미친 좀비(Zombie)들처럼. 피곤에 반쯤 절어서 뭔가 초점을 잃은 듯한 건조한 눈망울을 가진 애잔한 좀비들처럼. 서로가 미친 듯이 경쟁하면서 그 철조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그런 온갖 경쟁의 뜨거운 열기로도 전광판의 빛을 밝히지 못하면 철조망을 녹이지 못해서, 사랑하는 사람과 연결될 수 없는 고통으로 울부짖고 있는 모습들도 보인다. 그 철조망이 계속 존재하는 한, 수많은 전광판 좀비들은 계속 태어날 것이다. 철조망 자체가 바로 많은 사랑의 흐름을 차단하고 있는 전쟁판이자 경쟁판이라서, 치열한 스펙의 열기로 총점의 전광판을 계속 찍어내고 있는 공장이나 다름이 없을 테니깐. 한국형 전쟁용 철조망의 나무에 ‘전광판 좀비’ 열매들이 주렁주렁 맺히듯이 아주 풍성한 수확이 계속 지속되지 않을까. 이런 장면이 바로 첫 표지나 영상 대문의 그림으로 딱 어울려 보이는 화면이 될 것 같지 않은가. 서로의 사랑을 연결시켜 주는 ‘큐피트의 화살’ 같은 빛나는 스펙 전광판에 애걸복걸하는 좀비들이 철조망 주변에 득실거리는 모습의 장면까지 추가된다면 더욱 인상파 같은 그림이 되겠지.
만약 선의의 경쟁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적정 수준에서 이루어진다면 나름의 열정적인 의욕과 총기가 가득한 눈빛들로 반짝거릴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스마트한 코리안들이 많은 편이라서 총기로 빛나는 저런 눈빛들도 분명 많을 텐데 말이야. 하지만 경쟁의 정도가 너무 심하게 과도하면 그 열기가 점점 과열되어 저런 좀비의 눈빛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는 점이 안타깝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 같다. 경쟁이 하고 싶은 이유는 진심으로 열망하는 소망이나 성취를 위한 것이어야 하는데, 경쟁적 분위기가 너무 심해지면 그런 본질적인 목표에 온전하게 초점을 맞추기가 어려워진다. 그만큼 자신의 진정한 소망은 미리 자포자기하거나 망각하게 될 정도로 그저 경쟁 자체에만 매몰되어 허우적거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자신의 소원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하게 빛나던 눈빛과 영혼은 점차 그 빛을 잃어버리거나 퇴색되기도 한다. 이렇게 과도한 경쟁적 분위기로 인해서 저런 상상 속 프로그램의 첫 장면이 우리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면, 진짜 좀비처럼 쏘울이 바닥나버린 것과 뭐가 다를까.
다큐멘터리의 타이틀 그림을 연상하는데 왜 갑자기 좀비가 연상됐나 싶었다. 아마도 좀비가 ‘살아있는 시체’라서 그런 것 아닐까. 그래서 그런지 좀비가 나오는 장면들을 보면, 뭔가 인간의 영혼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그저 몸만 살아서 움직이는 몽유병 환자들처럼 보일 때가 많다. 특히 눈은 허공에 떠있는 듯 텅 빈 느낌으로 어떤 기운이나 색감도 느껴지지 않아서 생기 없는 시체처럼 그렇게 고정된 눈빛이다. 시체가 다시 살아난 좀비라고 해도, 신체만 부활했고 영혼은 전혀 다시 살아나지 못한 상태처럼 보인다. 진짜로, 그저 몸만 살아난 시체 같다.
실제로도 너무 심한 경쟁 자체에만 파묻혀서 내 삶의 진짜 목적과 방향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고찰과 진정한 소망은 뒤로 한 채, 그저 뒤처지지만 않으려고 습관적으로 항상 경쟁에만 시달리고 있다면 좀비와 뭐가 다를까. 이 혹독한 경쟁 사회에서 죽지 않고 살아내기 위해서 경쟁에 목매달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 몸 하나 살리기 위한 이런 눈물겨운 경쟁의 전투가 오히려 나의 소중한 영혼과 정신은 반대로 죽이고 있던 것이 아닐까.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은 자동으로 항상 경쟁의 레이스(race)에서 전력 질주로 달리고 있지만 나의 가슴과 심장은 작동하지 않고 쏘울은 정지되어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몸만 살아있고 정신과 영혼은 죽어있는 좀비와 다름없는 것 아닌가? 와, 진짜 서로 너무나 연관성 높은 이미지의 상관관계로군! 맹목적으로 미친 듯이 경쟁에만 시달리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 이렇게까지 좀비와 닮아있을 줄이야.
이런 극심한 경쟁에 시달리는 좀비들이라 그런지, 그들의 지쳐있는 눈빛에는 조금은 애잔한 듯한 감정이 느껴질 때도 있다. 좀비들의 씁쓸한 서글픔의 대사가 잔잔하게 가슴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은, 가끔씩 좀비 영화를 너무 현실감 있게 보듯이 심취해서만 그런 걸까. 전혀 말 한마디 없어도 뭔가 다 읽히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특히 저런 철조망 사랑의 좀비들 눈빛 대사는 더더욱 이렇게 읽히는 느낌일 것 같은데?
내가 당신보다 10점이나 부족한 총점인데,
그대와 과연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나는 스펙 등급이 B급인데,
당신 같은 A급을 사랑합니다.
제 사랑을 받아주시겠습니까.
나는 다행히도 엄청난 경쟁의 승리로
A급이 되었는데,
당신의 타고난 재력(財力)을 따라가려면
몇 십 년을 더 벌어도 가능할까 말까예요.
이런 저라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나는 모든 것을 다 갖췄어도
바쁜 직장인이라서 함께 할 시간이
거의 없을 수도 있어요.
그 외로움을 혼자 다
감당할 수 있으신가요.
그래도 저랑 사랑하시겠습니까.
플리즈.
서로 언제 성사될지도 모르는 사랑을 향한 기약 없는 공허한 슬픔들을 가득 안은 채로 구애하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저렇게 그들 사이에 있는 장벽과 격차가 바로 ‘검은 손의 환경 철조망’들일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집안 간 장벽이나 나라 간의 전쟁터 장벽들은 일종의 ‘보이는 검은 손’의 환경이라면, 저런 전광판 스펙들의 격차는 바로 ‘보이지 않는 검은 손’의 환경적인 장애 요소들이 아닐까. 이렇게 애처로운 좀비들이 꽤나 많을지도 모른다. 겉으로 티가 나지 않을 뿐, 혼자서 속앓이 하는 좀비들까지 합치면 어마어마하게 많을 수도 있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마라’는 속담의 심정처럼 말이지. 저런 한국 속담이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이나 타고난 재능의 차원에서 탐욕의 마음을 버리라는 의미라면 겸허한 차원에서 나쁘지 않은 뜻일 수도 있겠지만, 그저 순수한 사랑의 감정 같은 차원까지 저런 속담이 무조건적으로 적용되는 건 좀 가슴 아픈 현실 아닐까.
아무리 신분제 사회는 벗어났다고 할지라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저런 장벽들이 결국에는 실질적인 신분 사회를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싶은데. 비록 태생적인 신분제는 아닐지라도 후천적인 신분제나 다름없어 보이거든. 과거의 신분제 혼인 같은 제도적 장벽을 법적으로만 없앴을 뿐이지, 우리가 오랫동안 형성해온 사회적 인식의 장벽들로 인하여 보이지 않는 편견들로 점철된 인식과 관념의 장벽이 더 굳건하게 두터워 보이는 건 어찌할꼬. 그런 철조망 좀비들의 피눈물이 딱딱하게 굳어서 저 공허한 눈망울 아래 어딘가에 붙어있을 것 같은 이 느낌적인 느낌은 무엇일꼬.
물론 아주 용기 있는 자들이라면 저런 두터운 장벽도 헤쳐 나갈 수도 있겠지만, 둘만의 심리적 장벽은 사랑의 힘으로 극복한다고 할지라도 주변 환경의 또 다른 장벽들도 꽤나 있을지도 모를 테니 분명 그리 쉬운 일은 아닐 수도 있으리라. 더구나 경쟁 판의 전쟁터 철조망의 좀비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럴 수 있으리라. 하지만 넘치는 경쟁으로 아무리 각박한 좀비 세상일지라도 고정된 시선의 무미건조한 눈망울이 아니라 좀 더 사람답게 생기나는 눈빛들의 좀비가 많아진다면 조금씩 좋아지지 않을까 싶은데.
하긴 이런 눈빛들을 되찾는다면 그때부터는 더 이상 좀비가 아니라 제대로 살아있는 인간들의 눈망울일 테니깐 당연한 거겠네. 좀비 세상이 아니라 인간다운 인간 세상이 되는 것 말이지. 국내 여행길에서는 정말 사람다운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마주칠 수 있었는데, 참 신기하게도 회사 사무실 안으로만 들어가면 그런 사람 냄새가 붕괴되는 것 자체가 바로 우리나라 기업 조직들이야말로 그런 좀비들로 그득한 철조망 세상이란 얘기 아닌가. 그렇다면 경쟁의 도가니인 이런 좀비 사회에서는 왜 사람다운 눈망울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가 많은 걸까. 특히 사랑의 철조망이라면 이런 마음을 머금은 눈빛들이 더욱 좋을 것 같은데.
하루에 따뜻한 차 한 잔은 같이 할 수 있는
그런 따스한 사람이랑 함께 하고 싶어요.
햇살처럼 따스한 그런 일상을 나와 함께 해주실 수 있나요.
그런 당신이라면 사랑하고 싶어요.’
‘당신은 평소에 뭐 하는 것을 좋아하나요.
취미가 뭔가요. 꼭 특정 취미까지는 있지 않아도,
나랑 가끔 저녁 산책이나 드라이브를 함께 하면서
소소한 수다를 같이 떨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왠지 당신이라면 그런 시간이 즐거울 것 같아요.
그래서 당신과 사랑하고 싶어요.
난 여름에는 팥빙수를 좋아하고,
치킨은 사계절 내내 항상 좋아해요.
당신의 간식 취향도 나랑 비슷하신가요.
일주일에 최소 한두 번은 이렇게 맛난 것들을
실컷 같이 먹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우리만의 ’디너 파티(dinner party)‘ 타임! 좋지 않나요?
내가 너무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을
내가 너무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먹는 그 순간들이 바로 행복 아닐까요.
이런 행복의 순간들을 당신과 쌓고 싶어요.
한두 달에 최소 한두 번 정도는
영화나 공연도 같이 감상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아무리 바빠도 가능한 서로의 그런 시간이 끊어지지 않으면 좋겠어요.
사랑하는 당신과 그렇게 연애하는 기분으로 살면 좋겠어요.
비록 시간이 오래 흘러서 설령 그런 감정이 무뎌져도
우리의 일상만큼은 서로에게 그럴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나와 함께 이런 소중한 순간을 공유하고 싶으신가요.
솔직히 난 당신을 왜 사랑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대를 사랑하니깐,
앞으로함께 하고 싶은 것들은 많은데
그냥 당신이 옆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서
무언가 구체적인 소망은 아직 떠올려본 게 없네요.
근데 분명한 건 내가 왜 그대를 사랑하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는 거예요.
무슨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이거든요. 그래서 그냥! 당신이 제 옆에 있으면 좋겠어요.
진짜 사랑에는 이유가 없는 거라는,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은 있는데.
진짜 그런 거면 나도 지금 정말로.
사랑에 빠진 게 맞는 거네요? 신기하네요.
나는 세상에서 가장 이성적인 사람인줄 알았는데,
이렇게 아무 이유 없이 무턱대고 감성적인 사랑 따위를 하게 될 줄이야.
아마도 당신이 나를 많이 사랑해주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서서히 마음이 열렸나 봐요.
머리에 꽂힌 스펙 전광판만 떼어내도 저리들 나름 ‘낭만 좀비’들이 가능한데 말이야.
왜 그리들 점수와 스펙에만 열광되어 있는 ‘전광판 좀비’들로 전락되어 철조망의 튼실한 열매들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지 좀 안타깝네. 실제로 좀비 사회에서는 저 많은 좀비 군중들의 눈빛에서 저런 낭만 대사들이 잘 읽히지가 않는 것을 보면 진짜로 영혼은 없는 몸만 살아있는 시체들 같은 느낌이다. 솔직히 자세히 들여다보면 엄청난 낭만까지도 아니다. 그저 인간적인 삶을 원하는 사람다운 대사들일 뿐이지. 근데 쏘울 없는 좀비들이 저렇게 말한다고 상상하니깐, 뭔가 대비 효과 때문에 더 로맨틱하게 느껴지는 것 같을 뿐.
하긴 자신의 영혼 같은 쏘울이 없으니깐 맹목적으로 미친 듯이 전광판의 점수만을 높이려고 철조망으로 달려들고 있을 수도 있지. 우리나라에서 스펙 전광판은 ‘사랑의 큐피트 화살’뿐만 아니라 ‘직업의 큐피트 화살’도 되어주는 아주 중요한 수단이자 자산일 테니깐 말이야. 치열한 경쟁의 철조망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 힘없고 나약한 구성원으로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일종의 사회적 평가 기준에 해당하는 저런 스펙 전광판을 빛내기 위해서 열을 올리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 개개인 하나가 바뀌는 것보다는 어쩌면 저 철조망을 사회적으로 먼저 걷어내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고 좋은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본의 아니게 자신의 마음이나 쏘울은 뒷전으로 한 채, 여전히 계속 경쟁에 미친 좀비가 되어 스펙과 점수를 단 일점이라도 더 올리려고 혈안이 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을 테니깐.
물론, 이런 방식이 자신의 능력이나 재능을 발전시키는 측면도 있기 때문에 항상 나쁘다고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공정한 평가 기준으로서 어느 정도는 필요하기도 하니깐 말이지. 다만 과하게 될 경우에는 발전을 위한 생산적인 방법이 아니라 그저 살아남기 위한 생존 수단으로만 경쟁에 시달리게 된다는 것이 문제 같아 보인다는 것이다. 일자리 전쟁뿐만 아니라 저렇게 사랑의 전쟁을 위해서도 경쟁 철조망은 뜨거운 스펙의 열기로 가열되고 있고, 우리의 좀비들은 그런 경쟁 사회에 파묻혀서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을 그 쳇바퀴 속으로 수시로 집어 던진다. 분명히 처음에는 자신의 성공과 사랑을 위해서라고 생각했겠지. 누구나 처음 출발은 그런 좋은 마음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경쟁이 과도하게 되면 어느 시점에서는 삶의 목표와 수단이 주객전도 되어버려서, 자신의 진정한 소망과 행복이 뭐였는지도 망각한 채로 경쟁의 전쟁터에서 항상 전투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만 발견하게 된다. 그래도 ‘먹고사니즘’ 같은 구직이나 취업을 위한 경쟁은 저런 전광판의 모습이 조금은 납득되는 측면이 있다 쳐도, 우리의 아름다운 감정 영역인 ‘러브니즘’의 사랑 이슈까지 이런 현상이 판을 치고 있는 건 좀 서글프지 아니한가.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게 무엇보다도 오로지 나의 스펙과 점수를 올리는 것만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황폐한 심정인가. 그래서 상대방보다 자신이 조금만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괜히 먼저 위축되고 웅크리게 되어 미리 의욕 상실하고 좌절해버리면, 어떻게 진짜 사랑이라는 감정들이 순환될 수가 있을까. 감정이란 건 숫자 매칭(matching)만 되면 끝나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주고받아야 하는 핑퐁(pingpong)처럼 순환의 측면이 더 클 텐데. 설령 비슷한 스펙의 사람들끼리 취향도 비슷하고 대화도 잘 통해서 그렇게 연결되는 것이라면 정말 이상적이겠지만 그저 사랑이라는 숭고한 감정 자체만은 그런 숫자만으로 통하는 게 아닐 때가 훨씬 더 많지 않나.
그런 만큼 사랑의 성공 영역까지 스펙 전광판이 비중을 너무 많이 차지하고 있으면 서로 간에 애초부터 연결 가능성이 높을 수도 있었던 아까운 사랑의 사람들마저도, 미리 포기하고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해버리는 현상들을 더욱 증가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들을 우리 스스로가 자초하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