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익은 과일이 주렁주렁 달린 과실나무를 보면 괜히 뿌듯하고 기분이 꽉찬다. 겨우내 찬서리 맞은 앙상한 가지에서 봄이 되면 다시 꽃을 피우고 작은 열매를 키우는 나무가 매년 생명의 기적을 보여주는 것같아 탐스럽게 자란 과일이 대견하고 고맙다. 이런 마음을 헤아리듯 팔만대장경에는 과일을 '도(道)'라고 말하는 구절이 있다.
과일은 익은 벼와 같이
도(道)에 이름을 뜻한다.
- 팔만대장경 八萬大藏經
이 구절을 보는 순간 '도(道)'에 이르는 과정이 영상처럼 떠올랐다.
잘 익은 과일은 누구나 먹고싶어하고 손이간다.
'도(道)' 또한 그 깨달음이 완성되면 저절로 사람이 모여들고 베풀 것이 가득할 것이다.
일단 잘 익은 열매를 가져온 사람이 어떤 식으로 먹을지 몰라도 그 과일을 먹게 된다.
그리고 사람이건 동물이건 누군가의 손에 들어간 과일은 다 먹고 배설물이 되어 다시 흙으로 돌아가게 된다.
또 과일에서 뱉어낸 씨앗은 흙과 만나 뿌리를 내리고 다시 자라는 과정을 거치고 거치면서 과실나무로 자라게 된다.
'도(道)' 또한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친다. 마음밭에 뿌려진 '도(道)'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점점 자라 나무가 되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잘익은 과일처럼, 성숙한 '도(道)' 를 접한 이들은 '도(道)' 의 과일을 먹고 그 맛에 반하고, 향기에 취하고, 배 부르며,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이렇게 '도(道)' 를 맛본 사람이라면 과일이 영글때가 되기를 기다릴 것이고, '도(道)' 는 돌고돌며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이처럼 팔만대장경에 쓰여진 "과일은 익은 벼와 같이 도(道)에 이름을 뜻한다."는 말씀은 과일이나 익은벼와 같이 자연의 순리에 따라 생장소멸하며 순환하는 도의 이치와 영향력을 한마디로 잘 설명해주고 있다.
이 말씀을 음미하다보니 노자 도덕경의 한구절이 오버랩되었다.
"道可道非常道(도가도비상도) 名可名非常名(명가명비상명)" 이 말이다.
"도라고 해도 항상 같은 상황의 도가 아닌 것이며, 이름이라 하더라도 항상 같은 느낌의 이름일 수가 없는 것이다."
팔만대장경의 '도(道)'와 노자 도덕경의 '도(道)'가 표현만 다르지 전혀 다르지 않고 동일하다.
'도(道)'는 만물을 생장시키지만, 만물을 자신의 소유로는 하지 않는다. 도는 만물을 형성시키지만, 그 공(功)을 내세우지 않는다. 도는 만물의 장(長)이지만 만물을 주재하지 않는다'(10장).
노자는 '도(道)는 자연(自然)을 법(法)한다'(55장)고 말하는데, 익은 과일이나 익은 벼가 말없이 자신을 세상에 내어주듯이 '도(道)'또한 어떠한 자랑이나 공치사없이 그 도를 세상에 펼치는 것이 순리이다.
또한 익은 과일이나 익은 벼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요리되고 먹고 사라질지 모르며, 다 먹고 난 후의 과일이나 벼는 이미 그 본질을 잃어버리고, 배설물이 되거나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을 '도(道)'에 적용하면 '도(道)'라고 해도 항상 같은 상황의 도가 될 수 없다. '도(道)'가 어떤 이에게 어떤 식으로 가닿느냐에 따라서 그 상황이 다르고 깨달음도 다를 것이기때문이다. '이름(名)' 또한 다를 것이 없다. '익은 과일'이라 부르든, '익은 벼'라 부르든, 그것을 '도(道)'라 부르든 간에 그 이름들이 항상 같은 느낌의 이름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이미 불려지고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상황에 따라 그것들은 각각 먹히고, 부셔지고, 사라지면서 세상에 흩어지고 만다. 다만 그 본질은 변함이 없어서, 씨앗이 다시 자라 나무가 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이, 도와 이름 모두 순환하고 만물을 형성해 나간다. 그리고 그 공(功)을 내세우지 않고 그 어떤 것도 주재하지 않으며 물처럼 흐르고 공기처럼 존재한다.
"道可道非常道(도가도비상도) 名可名非常名(명가명비상명)"
처음 이 말씀을 접했을 때, 머리를 큰종에 부딪혀 종소리가 온몸을 울리는 기분이들었다.
마치 돌고도는 도의 이치를 하나의 이미지로 압축해서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같았다.
예전에 명리를 공부하시는 분이, 공부를 하다가 막히면 숲이나 강 등 자연을 찾아간다던 말이 떠오른다. 그 분은 다람쥐가 열심히 도토리나 알밤을 주어 나무구멍에 숨겨 놓는 모양이나, 노랗게 익어가며 고개를 숙이는 벼 등 자연을 관찰하다보면 사람의 사주팔자가 비교되면서 의문이 풀린다고 했는데 그 말이 꽤 공감이 되었다. 나도 우연히 발밑을 기어가는 개미들이 열심히 먹이를 나르는 모습을 보거나, 화려했던 장미꽃이 검게 시들어 가는 모양을 보면서 삶을 반성하고 의문을 풀기도 한다.
돌아보면 설 익은 열매를 조급한 맘에 너무 일찍 따버려 실수하고 후회한적이 정말 많다. 설익은 열매는 떫고 배탈을 일으킬 수도 있는 것처럼, 어설프고 모양만 엇비슷하게 갖춘 재주나 실력은 능력을 발휘하기도 전에 창피를 당하거나 문제를 일으켰다. 자연의 순리를 거슬러 인위적으로 물을 들이고 단맛을 억지로 들인 과실은 결국 소비자에게 꼼수가 들통나고 외면 당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자연의 이치를 따라 정성을 들이고 기다리는 것이 진정한 '도(道)'라는 것을 나이가 들면 들수록 깨닫고 뒤늦은 후회와 반성을 하게 된다.
아무리 1년이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간다고 해도, 과일이 익기까지 거쳐야 할 과정은 빠지지 않고 거치면서 성장하고 열매를 맺는다. 우리 삶에서 어떤 건 너무 빨리 익고, 어떤 것은 너무 더디 익어 기다리다 지치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래도 반드시 어느때인가 열매가 익어 수확할 때가 온다. 너무 서둘러 열매를 따버리거나, 제 풀에 지치거나 조바심이 나서 나무를 베어 버리지 않는 이상, 우리가 정성들여 가꾸고 기다린 인생의 나무는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그 열매를 우리는 진정한 '도(道)'가 그렇듯이 세상에 댓가없이 나누고 또 다시 '도(道)'를 배우며 성장해 나가야 한다. 그렇게 살다보면 우리도 어느새 익은 열매처럼 익은 벼와 같이 '도(道)'에 이르게 될 것이다.
※ 참고 도서
심상원 강론・손태성 정리. 『도인이 풀이하는 도덕경 강론』. 동행.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