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지갑

허망과 성찰

by 안명심

사우나는 언제나 내게 작은 쉼표였다.

뜨겁게 달아오른 증기 속에서 땀을 흘리다 보면,

내 몸에 걸터앉은 피로가 서서히 벗겨졌다.

그곳은 낯선 사람들이 같은 온도를 공유하며 잠시나마 무장을 내려놓는 곳이었으니까!

그러나 오늘, 그 익숙한 공간이 나를 배신했다.

누군가 나의 사물함에서 지갑을 가져간 것이다.



1. 분노 – 누군가의 손길

처음 든 감정은 분노였다.

내 것이 아닌 것을 가져간 낯선 손길. 단순히 돈을 훔친 게 아니었다.

그 안에는 나의 이름, 나의 번호, 나의 삶을 증명하는 카드들이 있었다.

그것들을 들고나간 순간,

그는 단순히 물건을 가져간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일부를 훔쳐간 셈이다.


“왜?”라는 질문을 마음속에서 되뇌었다.

왜 하필 내 지갑이었을까. 왜 하필 오늘이었을까.

왜 남의 삶을 그렇게 가볍게 들고 갔을까!



2. 허망 – 사라진 일상의 조각들

지갑 안에는 돈이 조금 있었다.

크지 않은 금액이었으니, 그것이 목적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 허망했던 것은 작은 조각들이었다.

운전 면허증. 은행카드. 지하철 G-pass.

한양대 학식권 몇 장. 사우나 티켓 몇 장. 마사지 카드 모서리가 구겨진 영수증.

그것들은 내가 밟아온 시간을 보여주는 작은 기록이었다.

사소하지만, 결코 대체할 수 없는 내 일상의 흔적.

그 모두가 낯선 손에 넘어갔다.


나는 허공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지갑이라는 것은 단순히 돈을 담는 도구가 아니구나. 그것은 내 삶을 압축한 작은 아카이브였다.

누군가가 내 서랍을 함부로 뒤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3. 현실 – 남겨진 일들

분노와 허망함에 잠겨 있을 틈은 없었다.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홈페이지에서 지급정지를

했다

"분실신고 및 재발급 신청완료"라는 문자가

오자 드디어 안심이 되었다


내일은 경찰서를 찾아가야 한다. 분실 신고를 하고, 임시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아야 하고

지갑도 새로 마련해야 한다


4. 사유 – 잃어버림의 의미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에 잠겼다.

지갑은 작은 물건이지만,

그 속에는 내가 살아온 시간이 차곡차곡 들어 있었다. 그것을 잃는다는 것은 단순히 물질을 잃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증명하는 방식 하나를 잃는 것이다.

그리고 깨달았다.

세상은 언제든 나를 흔들 수 있다.

내가 아무리 지키려 해도,

어떤 순간에는 허무하게 잃을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그 후에 내가 무엇을 붙잡느냐였다.


오늘의 사건은 분명 불쾌하고 불운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묻는다.


‘나는 무엇을 진짜 내 것이라 부를 수 있을까?’

지갑 속의 돈은 사라졌다. 카드도, 티켓도, 내 손을 떠났다.

그러나 나의 분노, 허망, 사유는 내 안에 남아 기록이 되었다. 그것만큼은 누구도 가져갈 수 없다.


5. 기록 – 남겨야 할 것

나는 오늘 지갑을 잃었다.

그러나 이렇게 글로 남긴 순간,

이 경험은 단순한 분실 사건이 아니라 사유의 기록이 되었다.

기록은 사라지지 않는다.

훔쳐갈 수도, 지워낼 수도 없다.

오늘 남긴 이 기록은,

사라지지 않고 내 곁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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