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의 합창. 그 너머에

살아있는 나의 목소리

by 안명심

사계절이 스물다섯 번 바뀌는 동안 합창단은

나의 삶의 중심이었다.

가족의 일, 생업의 무게, 나를 흔드는 수많은 변수가 있었지만 합창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나를 기다려주었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

첫 오디션 곡으로 비목을 부르던 날

떨려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고

심장에서는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지금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난다

그 순간부터 함께 부른다는 것이 얼마나 특별한 일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첫 무대에 섰던 날의 전율도 생생하다.

무대 위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던 단원들.

서로의 눈빛 속에는 설렘과 기대가 교차했다.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어 하나의 음. 하나의 호흡이

되었으며 여럿의 목소리가 어우러져 음악이 되어가는

그 감각에 감동했다.

눈부신 조명 아래, 수많은 시선이 내 앞에 쏟아지고, 입술이 떨리고 호흡이 흔들렸지만,

옆에 선 단원들의 숨결이 나를 감싸주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는 울림,

그것이 합창의 본질임을 그날 알았다.


시간은 목소리를 바꾸어놓았다.

날렵하게 뻗는 소프라노의 고음은, 부를 기회조차

없는 알토 파트이지만 긴 프레이즈를 버티기 위한

숨도 점점 가빠졌다. 그러나 그만큼 울림은 더 깊어졌다. 세월이 스민 목소리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삶의 고백처럼 변해갔다.

내 음에는 웃음과 눈물, 기쁨과 상실이 모두 담겨 있었다.

늙어가는 몸이지만 노래는 오히려 젊어졌다.

삶이 겹겹이 더해진 만큼, 더 단단하고 깊은 합창을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오래 함께했던 이가 세월 속에 떠나기도 하고, 새로운 얼굴이 그 자리를 채우기도 했다.

사람은 바뀌었지만 노래는 이어졌다.

그 연속성 속에서 나는 위로를 받았다.


ㅡ호주ㅡ


그리고 합창은 내게 세계를 열어주었다.

여러 나라 무대에 올랐고, 그때마다 낯선 청중의 눈빛과 다른 언어의 공기를 노래로 가르며 새로이 배웠다.

그 가운데 가장 잊지 못할 순간은

2022년 스위스, 그슈타트의 메누힌 페스티벌이다. 현지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합주는 나의 목소리를 세계의 울림 속에 얹는 경험이었다.

그날 무대에서 나는 내가 작디작은 음표이면서도, 동시에 거대한 화음을 이루는 일부라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

무대 밖으로 이어진 14일간의 여행 역시 소중했다. 알프스의 맑은 공기와 호수의 투명한 빛.

시그리스빌 다리에서 우리는 노래와 삶이 한 몸처럼 이어진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 추억은 지금도 나를 떠받치는 힘이 된다.



케빈(스위스 오케스트라 지휘자)과의 연습풍경은 오래된 그림처럼 마음에 남아 있다.

긴 손가락으로 자진모리를 지휘하던 케빈의 손끝.

잠시 쉴 때마다 터져 나오던 환호.

소소한 순간들이 모여 나의 여름을 가득 채웠다,

그 장면들은 지금도 내 삶의 가장 따뜻한 배경이다.


ㅡ스위스ㅡ



올해의 무대는 더욱 특별하다.

25년이라는 시간이 겹겹이 쌓인 채 맞이하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악보 위의 작은 점들이 마치 내 발자취처럼 느껴진다. 그 점들을 따라가다 보면, 내가 걸어온 길이 선율로 이어져 있음을 확인한다.


합창은 나에게 길을 가르쳤다.

내 목소리를 줄여야 다른 이가 빛날 수 있다는 것, 각자의 차이를 인정할 때 비로소 진짜 울림이

생긴다는 것.

목소리를 맞추어야 한다고. 그래야 음악이 되고,

그래야 삶도 화음을 이룰 수 있다고.


25년 전, 첫 오디션에서 느꼈던 낯선 떨림은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다.


10월, 다시 무대에 오른다. 조명이 비추고,

함께하는 단원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객석의 숨결이 하나로 모이는 그 순간.

다시 한번 전율을 느끼고 싶다


"25년의 합창, 그 너머"

거기에는 다음 무대를 향한 설렘이 있다.

아직 부르지 않은 노래가 있다.

그리고 여전히 살아있는 나의 목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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