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은 왜 떨어지며 빛나는가

가을이 나를 관통하며 지나간다

by 안명심


낙엽은 왜 떨어지며 빛나는가.



낙엽 은 소멸하기 위해 빛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의 모든 과정을 응축해 가장 찬란한 모습으로 완성되었음을 선언하는 행위다.

그 눈부신 빛 속에는 지나간 날들에 대한 묵직한 회한, 모든 풍파를 견뎌낸 나이 듦의 경륜, 그리고 기꺼이 다음 세상을 기약하는 숭고한 희망이 모두 담겨 있다. 그러므로 낙엽의 추락은 끝이 아니다.

가장 빛나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새로운 시작을 향한 가장 역설적인 비상이다.


가을은 본질적으로 상실의 정서를 품는다.

모든 것은 결국 떠나간다는 진리를 뼈아프게 확인하는 계절이다.

맹렬하던 초록의 기세가 꺾이고, 바람은 하루가 다르게 서늘해진다.

그 바람은 단순히 살갗만 스치는 것이 아니다.

미처 아물지 못한 마음의 틈새까지 예리하게 파고든다. 나무는 더 이상 잎을 붙잡지 않는다.

붙잡을 힘도, 이유도 없다.

잎도 가지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저 정해진 순리대로 제 몸을 중력에 맡길 뿐이다.

​우리는 그 속절없는 낙하에서 이별을 읽는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본다.

발밑에 나뒹구는 잎사귀 하나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청춘의 한때를 떠올린다.

왜 그때는 그토록 서툴렀을까. 왜 더 용기 내지 못했을까. 하지 못한 말, 붙잡지 못한 손,

애써 외면했던 수많은 기회들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미처 다 쏟아내지 못한 열정의 잔해들이 붉고 노란빛이 되어 발밑에서 타오르는 듯하다.

낙엽의 빛깔이 고울수록, 우리의 회한은 더욱 깊어진다. 그래서 가을은 스산하고, 또 아프다.

존재했던 모든 것들의 빈자리를 적나라하게 확인하는 일은 언제나 고통스럽다.

​하지만 의문은 남는다. 왜 잎은 푸른 날이 아니라, 하필이면 떨어지기 직전에 가장 강렬한 빛을 발하는가. 이는 ‘나이 듦’의 비밀과 닮아있다.


초록은 생존과 성장의 색이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획일적인 젊음의 상징이다.

그때의 잎은 오직 광합성이라는 ‘기능’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했다.

쉼 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하지만 가을이 깊어지고 생존의 의무가 옅어지면, 비로소 엽록소 뒤에 숨어있던 본연의 모습이 드러난다.

​노랑, 빨강, 짙은 갈색. 그것은 저마다 다르게 살아온 삶의 무늬다.

다른 잎과 비교할 필요도 없이, 저마다 고유한 색이다. 세월의 비바람을 묵묵히 견뎌낸 후에야 우러나오는 깊고 그윽한 빛이다.

젊음의 빛이 속도와 증명의 빛이라면, 나이 듦의 빛은 원숙함과 존재 자체의 빛이다.

낙엽은 더 이상 무언가를 생산하거나 증명할 필요가 없다. 그저 한 생을 통과해 온 존재 자체로 완전하다. 동시에 그것은 ‘덜어냄’의 미학이다.

불필요한 수분과 쓸데없는 욕망을 비워내고 가장 가벼워진 상태. 그렇게 가벼워졌기에 비로소 제 색을 찾고 바람에 몸을 실어 자유롭게 날아오른다.



나이 듦이란.

짐을 쌓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겹겹이 쌓인 껍질을 벗고 가장 순수한 본질에 이르는 과정일지 모른다.

낙엽이 빛나는 것은 스러지기 위함이 아니라,

가장 자기 다운 모습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그 빛나는 추락은 ‘희망’의 가장 강력한 증거다.

낙엽은 자신이 떠나는 가지 끝에 매달린 작은 겨울눈을 분명히 안다.

저 작고 여린 생명이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고,

머지않아 자신보다 더 푸른 새봄을 맞이할 것을 안다. 자신이 떨어져야만,

그리고 기꺼이 땅으로 돌아가야만, 그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맹목적인 희생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가 다음 세대의 토양이 된다는 ‘연결’에 대한 깊은 확신이다.

그래서 잎은 가장 화려한 빛을 발하며 기꺼이 몸을 던진다.

그 낙하는 소멸이 아니라 ‘내어줌’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워 얻은 빛으로 마지막 소명을 다하고, 땅에 닿아서는 썩어 거름이 된다.

차가운 겨울바람으로부터 연약한 뿌리를 덮어주는 따뜻한 이불이 된다.

자신의 죽음으로 새로운 생명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숭고하고 이타적인 순환인가.

희망은 허공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자신을 기꺼이 가장 낮은 곳으로 낮추고 썩어가는 헌신 속에서 비로소 싹튼다.


우리의 삶도 저 낙엽과 같아야 한다.

지나간 날들을 그저 회한으로만 채울 것이 아니다. 그 아쉬움과 후회조차 지금의 나를 만든 깊은 빛깔로 끌어안아야 한다.

나이 듦을 두려워할 이유도 없다.

그것은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고, 가장 나다운 빛으로 완성되어 가는 고귀한 과정이다.

그리고 그 원숙한 빛으로, 기꺼이 다음 세대와 새로운 시작을 위해 자리를 내어줄 수 있어야 한다. 가진 것을 끝까지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빛나다가 기꺼이 내어주는 삶. 그것이 낙엽이 온몸으로 가르쳐주는 지혜다.



​낙엽은 왜 떨어지며 빛나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명확하다.


자신의 생을 남김없이 살아냈고,
그 모든 시간을 지혜로 물들였으며,
자신의 소멸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오늘,

내 어깨 위로 떨어진 붉은 잎 하나가 묵직한 울림으로 내 안을 지나간다.

너는 지금 어떠한 빛깔로, 떨어질 준비를 하고 있느냐고, 나에게 묻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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