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침, 버스는 타임머신이었다

지난 여름날 시내버스 안에서

by 안명심

​발 디딜 틈조차 없던 그 아침의 시내버스는,

뽀얗게 먼지 쌓인 채 잊고 지냈던

나의 학창 시절을 통째로 눈앞에 소환한

예기치 못한 타임머신이었다.

그 숨 막히는 공간 속에서 나는 잠시 현재의 나를 잃어버리고,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들고 있는 열일곱의 나로 되돌아갔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서울로 향하기 위해 집을 나선

이른 시간이었다.

언젠가부터 전철역까지 시내버스를 이용한다.

정류장에 도착한 버스는 이미 포화 상태였다.

문이 열리는 순간,

안에서부터 터져 나올 듯한 열기와 함께

학생들의 물결이 나를 덮쳤다.

아, 등교 시간과 정통으로 맞물린 것이다.

​한숨이 나왔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서울에서의 정해진 시간은 맞춰야 했다.

나는 마지막 승객으로 겨우 몸을 구겨 넣었다.

"삑." 카드를 찍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말 그대로 거대한 ‘열기의 덩어리’ 속에 갇혔다. 앞사람의 등에 내 얼굴이 닿았고,

누군가의 가방이 내 허리를 찔렀다.

사방에서 샴푸 냄새와 옅은 땀 냄새,

그리고 특유의 텁텁한 공기가 뒤섞였다.

​불쾌감이 치밀어 오르던 찰나였다.

모든 감각이 순간 정지했다.

이 풍경. 이 소음. 이 밀도. 모든 것이 기시감처럼 나를 찔렀다.

​너무나도 익숙했다.

이것은 정확히 나의 10대 시절 아침 풍경이었다.



​눈을 감았다.

그러자 잿빛 교복을 입은 내가 보였다.

지금 내 옆에 서 있는 아이들처럼, 나도 매일 아침 이 전쟁을 치렀다.

손목이 빠질 듯 아픈 책가방을 들고,

혹여나 버스를 놓칠세라 정류장까지 뛰었다.

겨우 버스에 매달려 타서는, 친구와 눈이 마주치면 "죽겠다"는 표정으로 낄낄거렸다.

​버스 안은 언제나 우리의 해방구이자 교실의 연장이었다.

어젯밤 보지 못한 드라마의 결말을 떠드는 목소리, 쪽지시험 범위를 묻는 다급한 속삭임,

미처 다 하지 못한 숙제를 버스 손잡이에 기댄 채 부랴부랴 베끼던 친구의 볼펜 소리가 뒤엉켰다. 누군가는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부족한 잠을 청했고, 누군가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그 모든 소란함과 무질서 속에는 이상한 활기와 유대감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이 버스 안의 어른들이 한없이 멀게 느껴졌다.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신문을 읽거나,

피곤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던 그들.

그들은 우리와 다른 시간을 사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저 우리의 시끄러움을 잠시 견뎌야 하는, 풍경의 일부 같은 존재였다.


​문득 눈을 떴다.

​나는 그 풍경 속 ‘어른’이 되어 있었다.

​내 주변을 가득 메운 아이들의 얼굴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잠이 덜 깬 앳된 얼굴, 마스크 위로 빛나는 장난기 어린 눈동자.

그들은 지금의 내 나이를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들의 눈에 나는, 과거 내가 바라보던 그 ‘어른’ 중 하나일 터였다.

출근길에 찌든 무표정한 직장인으로 보였을까?

​기분이 이상했다.

시간의 지층이 통째로 뒤틀린 듯했다.

분명 같은 공간에 서 있는데, 나와 저 아이들은 서로 다른 시공간을 살고 있었다.

저들은 '미래'를 향해 가고, 나는 '과거'를 반추하고 있었다.

저들의 가방 속에는 교과서와 꿈이 뒤섞여 있을 테고, 내 가방 속에는 합창 연주곡 이 들어 있었다..

현실의 무게는 같으려나?


​버스가 크게 한번 요동쳤다.

중심을 잃은 한 학생이 내게 기댔다가 화들짝 놀라며 "죄송합니다" 하고 꾸벅 인사를 했다.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가볍게 웃어 보였다.

그 순간, 나는 그 아이에게서 나를 보았고,

아이는 나에게서 자신의 먼 미래를 어렴풋이 보았을지도 모른다.

​전철역 정류장에 도착했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버스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갇혀 있던 공기가 터져 나가듯 아이들이 쏟아져나갔다. 나도 그 무리를 따라 버스에서 내렸다.

해방감과 함께 묘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아이들은 재잘거리며 학교 방향으로 흩어졌다.

나는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반대편 전철역 입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불과 몇 정거장.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가장 치열하고 뜨거웠던 시절을 여행하고 돌아왔다.


​그날 아침,

나를 서울로 데려다준 것은 전철이었지만,

나를 과거로 데려다준 것은, 뜻밖에 마주친 그 만원 버스였다.


일상의 가장 불편한 순간이,
가장 빛나는 추억을 건져 올리는 선물이 될 수도 있음을

그 빽빽한 학생들의 물결 속에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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