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페이드 아웃

빛이 쉬러 가는 시간

by 안명심


페이드 아웃


가장 눈부시던 계절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뒷모습을 보인다는 건,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깊어지는 일이다

​치열하게 끓어오르던 한낮의 열기가

서서히 미지근한 공기 속으로 흩어진다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던 빳빳한 욕심들은

이제 낡은 책장처럼 모서리가 둥글게 닳아 있다

우리는 늘 선명한 것들만 사랑하느라

희미해지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잊고 살았다

숨 가쁘게 달려온 발자국 소리가 잦아들고

세상의 소음이 조금씩 멀어질 때

비로소 내 안의 조그만 목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기억은 이제 날카로운 파편이 아니라

물에 젖은 수채화처럼 부드러운 얼룩이 된다

지우고 싶던 얼룩조차 삶의 무늬였음을 인정할 때

풍경은 비로소 따스한 그늘을 내어준다

​어둠이 오는 것이 아니라, 빛이 쉬러 가는 것이다

나의 서사는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편안한 색으로 다시 칠해지는 중이다

화면이 완전히 어두워지기 직전의 그 따스한 회색


그 너머의 평온으로

천천히 발을 내디딘다








詩作 노트

<윤석화님의 부고를 듣고>
가장 다정한 이별의 방식은 '뚝' 끊어지는 암전이 아니라, 서서히 스며드는 '페이드 아웃'일 것이다
선명해야만 인정받고, 또렷해야만 살아남는 세상에서 우리의 눈과 마음은 늘 긴장 상태로 초점을 맞추고 살아간다.
​문득, 삶의 채도가 낮아지는 순간이 두려움이 아닌 '휴식'으로 다가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검은 화면으로 급하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인물과 배경이 천천히 어둠 속으로 녹아들 때 느껴지는 그 기묘한 안도감처럼 말이다
​이 시는 늙어감과 사라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평생 우리를 옭아매던 '선명함'이라는 강박을 내려놓는 과정이다.
너무 환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은, 빛이 줄어들 때 비로소 은은한 윤곽을 드러낸다.
​독자 여러분의 삶에도 잠시 미등(尾燈)만이 켜진 시간이 찾아온다면,
그것이 끝이 아니라 가장 편안한 휴식의 서막이길 바라고 싶다.
흐려지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풍경의 일부가 되어 영원히 남는 일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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