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일상의 균열

멈춘 회전이 하루를 적셨다

by 안명심


일상의 균열

-세탁기 앞에 서서-


탈탈거리는 소음도 경쾌하게 여겼다

내 몸의 얼룩을 제 몸으로 옮겨가며

회전하는 세계의 중심을 지키던 낡은 원통

갑자기 기계가 완강한 침묵을 선택했다

코드를 뽑았다가 다시 찔러보고

심장 같은 버튼을 수없이 눌러봐도

검은 액정 위엔 무뚝뚝한 에러 코드뿐

​비누 거품 속에서 헤엄치던 옷가지들이

축축한 절망처럼 바닥에 엉겨 붙어 있다

아무리 헹궈내려 애써도 지워지지 않는

기계 내부의 깊은 골절


​내 삶을 깨끗하게 펴주던 저 쇳덩이도

실은 오래전부터 삐걱거리는 비명을

세제 향기 뒤로 숨기고 있었나 보다

이제는 놓아주어야 할 시간

마지막까지 뱉어내지 못한 젖은 빨래들이

무겁게, 아주 무겁게

울음을 짜내고 있다


내 오늘에 대한 경고문 같기만 하다






탈탈거리던 소리가 정적에 잠기자
미처 짜내지 못한 수심이 거실 바닥까지 차오르는
기분이다.

시끄럽던 소음도 늘 음악이라 생각했는데
느닷없이 작동을 멈춘 세탁기.

수명을 다했나 보다
삶의 근본적인 한계를 닮은듯해
문득 슬픔이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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