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는 2차 대전을 거치며 본토는 독일에 점령당하고, 동남아에 있었던 해외 식민지는 일본에 점령당하며 한때 많은 것을 잃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으며, 동남아 식민지 중 제일 중요했던 인도네시아가 독립 선언을 하며 그들의 손을 벗어났다.
그러나 직접적인 영토는 잃었지만,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 시절부터 쌓아놓은 천연자원의 유통망과 생태계를 그들 중심으로 만들어놓고 있었기에 지금도 전 세계 천연자원 무역에서 그들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대표적인 것이 카카오다.
카카오빈은 네덜란드에서 전혀 생산되지 않고 그들의 옛 식민지로부터 전량 수입해 온다. 그러나 카카오매스, 버터, 파우더, 닙스까지 이어지는 소재 가공기술은 네덜란드에서 독보적으로 발달해 있다. 네덜란드로 운송된 카카오빈은 네덜란드 기술을 거쳐 고부가가치 소재가 되어 전 세계로 판매된다.
그뿐 아니라 세계 최초로 버터를 대체하는 마가린을 발명한 유지 가공기술 역시 네덜란드가 가장 앞장서서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이 역시 동남아의 천연 유지자원을 네덜란드로 이송한 다음, 이를 용도에 맞게 다양한 소재로 가공하여 고부가가치 산물로 만들어 판매한다.
네덜란드가 농업강국인 건 이렇게 농산물 가공기술이 있고, 그 기술을 바탕으로 고부가가치 소재를 생산하여 전 세계에 공급하는 생태계 조성이 따라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놓은 그들의 농식품 가공기술은 다른 농업 관련 기술이 발달하는 데도 기반을 제공해서 네덜란드가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농업강국이 되도록 만들었다.
농산물 생산만 보고 있다면 부가가치를 이끌어내기 힘들다.
농산물 생산 그 자체는 인건비가 싸고 생산 여건이 좋은 개도국에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선진국에서는 그걸 가공하여 식품과 타 산업에 쓰이도록 하는 가공기술을 갖고 있으며, 그 기술을 바탕으로 그들 중심의 유통 생태계를 만든다.
한마디로 밸류체인, 가치사슬이 그것이다.
내가 국산 밀 대체운동, 콩 대체운동을 해봐야 이렇게 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이미 수입 농산물 등으로 밸류체인이 만들어져 있고, 다른 게 들어올 경우 배타적인데, 단순히 원료를 국산으로 생산했다고 해서 그게 그 생태계에 자동적으로 들어갈 리 없다.
국산 농산물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생태계를 짜든가, 기존 수입 농산물 대비 우수한 특성을 내세워 기존 생태계에 편입되도록 하는 게 옳은 방법이다.
여기서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기존 생태계에 편입되는 방법은 딱 두 가지다. 가격 또는 품질이다.
GMO, 유기농, 국산. 이런 건 대체할 때 고려되는 속성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국산 곡물자원이 가공시장으로 확대 소비되려면 그 나름대로의 유통 생태계 조성이 꼭 필요하다.
품질에 대한 연구, 기술에 대한 연구가 생산 이상으로 많이 필요한데, 곡물 생산과 품종 연구만 절대적으로 많이 하고 있으니 될 턱이 없다.
네덜란드의 사례는 명확한 교훈을 준다. 원료 생산지를 잃어도 가공기술과 유통 생태계를 장악하면 농업강국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국산 농산물의 단순 생산 확대가 아니라, 그것을 가공하고 활용하는 기술과 생태계 구축에 집중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농업 경쟁력을 만드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