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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의 기술

- 유화의 본질은 무엇인가?

Food & Story     


  예전 식품가공기술을 처음 접했던 시절, 유화 기술이 만능이라며 이것저것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유화제 사용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많은 식품회사 연구원들이 유화제가 단순히 물과 기름을 섞어주는 것 외에도 항균작용, 유통기한 연장, 수분흡수 조절 등에서부터 각종 식품에 사용시 해결하기 어려웠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고 하여 한때 유화에 대한 많은 테스트를 해 본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화제에 의해 가능하다고 알려졌던 많은 효능효과들이 실제 테스트해보니 대조구와 비슷하거나 있더라도 약간 느낄 수 있는 수준에 그칠뿐 생각했던 것만큼 대단한 효과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는 결과가 대부분이었다. 유화제의 효능효과자료는 주로 해외 유명 소재업체에서 공급되어 널리 보급되었는데 그 정보는 회사의 명성과는 반대로 현실과는 맞지 않는 엉터리 정보였을까?     


  유화(油化)가 아니라 유화(乳化)다.


  20여년전 무균질 우유라고 하여 시장을 강타한 우유제품이 있었다. 소비자들은 무균질을 세균이 없다는 뜻으로 알아듣고 무언가 더 안전하겠구나란 인식에서 이 제품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무균질 제품의 원래 뜻은 無均質로서 균질하지 않는 우유라는 것이었다. 우유는 물에 유지방이 고르게 분산되어 있는 형태의 식품으로써, 원래 유지방은 물과 잘 섞이지 않지만, 우유단백질과 결합함으로써 물에 고르게 분산될 수 있게 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통상적으로 우유회사에서는 목장에서 가져온 원유를 시중 유통시키기 위해 가열살균을 하는데, 이때 열에 의해 유지방-우유단백 복합체가 변형되어 용해도가 감소하게 되므로, 이를 막기 위해 균질하는 것은 필수적인 공정이다. 그런데, 한글로 쓰면 같은 글자이기에 무균질(無均質)이 무균질(無菌質)로 둔갑한 결과 유지방과 유단백이 분리되어 우유품질은 더 낮아지게 되는 등의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유화는 비슷한 다른 단어로 오인할 경우 전혀 엉뚱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데, 특히 외국 자료의 번역과정에서 오는 오역 때문에 의도치않게, 때로는 의도적으로 유화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믿음이 생기는 듯 하다.


  유화의 정의는 두 종류의 섞이지 않는 액체를 강력히 교반하여 한 종류의 액체가 되도록 하는 조작이다. 이 때 유화를 돕기 위해 첨가하는 물질을 유화제라고 하며, 영어로 emulsifier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유화제의 유화가 油化 인 것으로 아는 사람이 너무나 많지만, 사실은 乳化 이다. 즉, 우유처럼 지방이 분산되어 있는 형태로 만드는 것이 원래 유화의 정의인 것이다. 기본적 정의마저도 다른 단어로 오해받기 쉬울 정도이다보니 유화는 실제 식품산업에서 통용되고 있는 기술마저도 실제와 다른 의미로 전파되고 있다.   

  

유화제가 아니라 기술로 유화하는 것이다.


  두 가지의 섞이지 않는 액체를 유화하려면, 유화제를 넣고 균질기에서 교반하면 된다. 여기서, 유화제가 유화의 필수조건이라고 인식하여 유화가 어려울수록 좋은 유화제 또는 최적화된 유화제를 찾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그러나, 사실 유화제는 보조제일뿐 핵심 사항은 아니다. 오히려 필수적인 요건은 유화에 사용되는 균질기의 성능이다. 보통 유화를 하게 되면 수중 유적형(O/W) 또는 유중 수적형(W/O)의 미셀(micelle)을 형성하고, 이것이 일정 필요 수준 이상으로 작을 경우 브라운 운동에 의해 액체내 분자들과 무한 충돌하면서 밑으로 가라앉지 않고 액체 내에 둥둥 떠다니게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반은 맞는 얘기지만 반은 실제와는 좀 다를 수도 있는 얘기이다.   

                      

< 다양한 유화 입자들 > (출처:en.wikipedia.org)


유화시 형성되는 입자는 흔히들 생각하는 구형의 미셀 구조외에도 화장품에 이용되는 리포솜이나 세포막의 이중층 구조 등 다양하게 존재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막대기형이나 원통형의 유화입자도 존재할 수 있다. 유화의 핵심은 균질기에 의해 물과 기름, 또는 물과 용매 등 서로 섞이지 않는 액체가 일시적으로 섞이는 점에 있다. 균질공정을 통해 섞이지 않는 두 액체가 섞이게 되면 필연적으로 양이 적은 한쪽은 구형의 작은 입자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때 이 작은 입자가 이웃한 다른 작은 입자와 합쳐져서 커지게 되는 반응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면 유화가 깨져서 두 액체는 분리되고 만다. 반면, 균질을 통해 형성된 작은 구형입자가 이웃한 구형 입자와 합쳐지지 않고 분리하여 존재하게 되면 유화시스템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유화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이웃한 구형 입자와 합쳐지지 않게 방해하는 물질을 첨가하는데, 이것이 바로 유화제이다. 유화제가 입자의 합쳐짐을 방해하는 힘은 정전기적 반발력 또는 입자사이의 구조적/입체적 방해작용에서 나온다. 유화를 잘 하기 위해서 좋은 균질기를 확보하는 것이 먼저고, 유화제를 고르는 것은 나중의 문제인데 실제 식품개발시에는 이것을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자연계에는 무수히 많은 천연유화제가 존재


얼마전 모 기업에서 요청을 받아 천연유화제에 대한 세미나를 진행한 적이 있다. 천연 유화제 이전에 유화 기술에 대한 이해가 먼저인 듯 싶어, 유화기술에 대한 자료들을 먼저 설명하고 여기에 천연 유화제에 대한 설명을 얹어 진행한 적이 있다. 전반적으로 천연유화제는 합성유화제보다 못하다라는 인식이 많이 퍼져 있는 듯하다. 필자도 과거 그런 사람중 하나였는데, 유화제 공부를 하면 할수록 적절한 기술과 함께 사용할 경우 천연소재도 합성유화제 못잖은 효과를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고 있다. 천연 식품원료중 단백질은 매우 효과적이고 우수한 식품유화제이다. 우유에서의 유화를 담당하는 것도 단백질이고, 육가공, 어육가공품, 제과/제빵, 소스 및 드레싱, 스프레드 등에서도 단백질은 정말 우수한 유화력을 발휘한다. 이 외에도 알긴산, 카라기난, 구아검 등 검류들도 유화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이외에도 각종 다당류, 식이섬유, 사포닌 화합물들도 유화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아라비아검과 카르복시메틸셀룰로스(carboxymethyl cellulose)로 대표되는 셀룰로스 유도화합물은 천연 유화제로서 우수한 기능을 가지고 있어 식품산업 전반에 걸쳐 널리 사용되고 있다.     

유화제보다 본디 식품원료의 기능을 살리는데 충실해야...


  케익의 수분을 촉촉하게 유지해주는 기능, 씹었을 때 치아에 들러붙지 않게 해주는 기능, 세포막을 파괴하여 미생물 증식을 억제해 주는 기능, 고결방지 기능 등 과거 유화제는 신비의 마법소재로서 소개된 면이 적지 않다. 그러나, 유화제가 가지고 있는 그런 기능은 원래 식품원료들도 충분히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기에 경우에 따라서는 목표로 하는 성능을 내기 위해 굳이 유화제를 따로 사용할 필요는 없을 수도 있다. 대신 가공기술과 설비가 원료의 유화기능을 내기 위해 최적화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무분별한 식품첨가물 사용에 대해 걱정하는 소비자가 많다. 이런 추세가 점점 강화됨에 따라 기존 원료의 가공응용기술을 발전시키면 유화제 사용을 줄이면서 원하는 기능을 내는 식품을 만들수도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 유화제 기능으로 특화된 신규 천연 소재의 개발도 기대해 봄 직하기에 단순한 유화제 적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진정한 식품 유화기술의 발전이 이뤄지기를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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