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력

불멸적 사랑에 대한 고찰

by 앤드류

이 글을 열어보신 독자님께.

당신이 느끼실 답답함, 이 글을 쫓아갈 그 눈길의 고단함, 생각의 지난함에 사과의 뜻을 먼저 밝히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십수 년 전 한 소년의 꿈을 떠올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시거나, 아주 잠시동안의 혼란을 껴안을 의지가 있다면, 마음을 열어주시길 바랍니다.

이 글재주 없는 글쟁이의 백일몽 같은 헛소리가,

마음에 웃돈 잡념을 기어코 적어낸 떠벌이의 허무맹랑이 당신께도 어떤 힌트가 되길 바랍니다.








0. 꿈이 남긴 의문에 대해서


십수 년 전 언젠가 이런 꿈을 꾸었다.


「깜깜한 곳이었다. 귀에 물이 들어간 듯 먹먹한 바람소리가 들렸다. 속에 있던 물이 빠지듯 귓구멍에서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발아래로 바닷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그곳이 밤이 내린 바다 한가운데라는 걸 알았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잔잔하게 흔들리는 바다와 하늘 위로 뜬 별들이 보였다. 수많은 별무리들. 그 사이에서 유독 반짝거리는 두 개의 별빛이 있었다. 나는 그들이 최초로 탄생한 필멸의 존재들임을 직감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곳에서 빛을 내고 있었을까.

이윽고 그 두 존재는 조금씩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하나는 수면 아래로 떨어진 물감처럼 푸르게 퍼져나갔고, 다른 하나는 이제 막 불붙기 시작한 불똥처럼 붉게 피어올랐다.

어디선가 가지 마!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괘념치 않았다. 그저 일렁거리는 그들을 보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손을 맞잡듯 뒤엉키기 시작했다.

푸른빛이 먼저 붉은빛을 집어삼키려 했고 붉은빛은 위태롭게 사그라드는 듯했다. 이어서 붉은빛이 다시 강렬한 힘을 되찾으려 할 때, 푸른빛은 겁먹은 듯 웅크렸다.

그것은 춤사위였다.

푸르고 붉은 두 빛의 강렬한 춤사위는 모든 별빛들을 집어삼키며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빛을 영원히 흡수할 기세였다. 어느새 바다와 밤하늘의 경계는 허물어져 있었다. 강줄기처럼 빛나던 은하수는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타오르는 화염 같았지만 뜨겁지는 않았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은 아마도 그들의 춤사위가 만들어낸 것인 듯했다.

거칠게 불어오는 바람이 잠시 눈을 흐린 사이 그것들은 멀어져 있었다. 꺄르륵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그곳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그 광경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싶었지만, 그들은 나의 시선보다 더 빨리 멀어지고 있었다. 먼 우주를 향해. 그리고 그들은 다시 하나의 별빛이 되었다.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직도 그날의 꿈에서 봤던 장면이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두 필멸의 탄생이 만들어낸 춤사위는 순간적인 것이었고, 그들의 소멸은 직접 볼 수 없었지만, 그 빛들이 사그라지는 모습을 떠올렸던 나는 어떤 슬픔을 느꼈다. 잠에서 깨고 나서도 눈물을 흘렸다.

슬프게 멀어진 그날의 장면을 두고서, 나는 '우리'라고 부르고 싶었다. 우리는 별빛이라고, 태초에 태어나 소멸에 이르기까지, 서로의 불규칙한 리듬에 모든 것을 맡긴 체 활활 타오르는 두 개의 불빛이라고.

다시 눈을 감고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가까이서 일렁거리는 그들의 곁에서 눈을 뜨며 깨어나고 싶었다. 슬픈 꿈을 꿨다고 칭얼거리고 싶었다.

삶은 아마도 무로 돌아가기까지의 여정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곧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불멸은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십수 년이 흐른 지금, 그 의문에 답을 주려 한다.



*



불멸은 어디에 있을까, 무엇을 두고 불멸할지어다 말할 수 있을까?

이따금 빠져들곤 했던 그 쓸데없는 골몰에 대해서, 최근 들어 그 답을 찾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되었다. 어렴풋 떠오른 그 답은 며칠사이, 강렬했던 그 꿈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그날의 꿈일기를 뒤적거리다 마침내 〈필멸의 빛〉이란 제목을 찾아내고는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그 안에 기록된 필멸의 존재들의 춤사위를 다시 떠올렸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 복잡 미묘하고 난해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아무래도 한두 마디 문장만으로 선뜻 내놓기 싫다. 그 복잡성과 난해함 만큼, 나는 몇 가지 과정을 거치고 싶다.




불멸에 대한 탐구

1. 부분적 실재론에 대해서


나는 철학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그것을 이렇게 정의한다.

"철학이란, 이름이 있든 없든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들로 삶의 본질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렇게 정의하기 위해 나는 두 가지 전제를 둔다.

첫째, 철학이 언어와 사유를 통해 만물을 새롭게 재구성한다는 것.

둘째, 따라서 철학은 항상 인간중심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볼 때, 나의 관점은 인식론으로 수렴한다. 인식론은 철학의 여러 분과들 중에서도, 실재론·관념론·유물론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물론, 이 이론들은 서로 대치되거나 구별되는 핵심을 내포하지만, 나는 그 세부 구분에는 매달리지 않기로 했다. 철학 전공자에겐 다소간 억지스럽고 자의적이라 생각될 수 있겠으나, 철학의 바깥에서 살아가는 비전문가로서 누리는 일종의 '사유의 자유'라 여겨주길 바란다.

어쨌든 나는 철학자가 아님에도, 스스로를 '부분적 실재론자'라 여긴다. '부분적 실재론'은 관념론과 유물론의 일부분을 수용한 실재론의 막무가내식 변형이다.


부분적 실재론자로서 나는, 실재론자들이 주장하는 '이름 없는 것들'의 실재實在-실체적 존재, 있음-에 '일부' 동의한다. 이름 없는 것들이란 인간적 사유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이다. 예컨대 철학의 다섯 가지 전통적 분과; 인식론, 윤리학, 미학, 형이상학, 논리학은 인간 없이 성립할 수 없는 개념들이다. 애당초 철학 자체가 오직 인간만의 향유하는 지적 활동이 아닌가? 그간 어떤 철학자와도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기에, 이 역시 가설에 불과하다.


윤리학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미학은 아름다움이라는 실체 없는 감각을 논리와 언어 속에 포착하려 애쓴다. 이 둘은 명백히 인간적 사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논리학 또한 독립된 언어적 기틀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철학적 사유를 지탱하는 방법론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형이상학만은 유일하게 인간적 사유를 넘어서는 듯하다. 실재할 수도 실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들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인간의 사유를 초월하려 한다. 그러나 결국 그조차도 인간의 언어적 틀 안에서 논의된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진다.

마지막으로, 인식론은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를 묻는다. 내게 있어 이 질문은 "불멸은 무엇이고, 무엇을 불멸한다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해 접근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자연과학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인문분야도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인간이 없었다면, 인문학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을' 분야이지 않은가. 심지어, 나는 수학조차도 그 안에 포함된다고 믿는다. 어떤 실재론자들은 수학적 개념조차도 실재한다 주장한다. 수학적 진리는 반드시 존재하며, 그 진리를 (플라톤적 이데아-오직 이성으로만 인식할 수 있는 영원한 이상적 세계-처럼) 인간의 감각적 인식과는 무관하게 '독립된 존재'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수학이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살아가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계산과 예측을 통해 편의를 얻기 위해 만들어진 언어체계일 뿐이지, 실재하는 존재가 아니다.


「세상천지 어디에 '1'이라는 실체가 존재하는가?

저기 보이는 자동차 한 대, 내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 한 개, 맞은편 자리에 앉아 골몰하는 여자 한 명, 누군가의 손끝이 간절히 소원하는 단 하나의 신… 그 모든 하나의 것들이 '1'이라는 관념을 포함할 뿐, 그 자체가 '1'은 아니지 않은가. '1'은 오직 우리의 머릿속과 언어 속에 자리할 뿐이다. 만약 우리의 문명이 한순간 사라진다면, '1'이라는 개념도 함께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한편, 우주를 지탱하는 힘-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만은 여전히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유체계는 내가 '부분적 실재론자'임을 증명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나는 인간적 사유에 의해 창조된 것들-실체 없이 이름만 붙은 것들-과 인간과 무관한 근원적 실재를 구분해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이런 구분이 항상 철저히 지켜질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나에겐 '사랑'이 그렇다. 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인간-최소한 인간에 버금가는 고등생명-이 없는 우주에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반대로, 사랑이 그런 인간적 산물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실재하지 않는 것인가? 나는 그렇다고 쉽게 단정할 수 없었다.

인간은 감각과 이성으로 세상-관념을 포함한 모든 것들-을 '해석'하는 존재이고, 그 해석이 없이는 실재는커녕 현상도 포착할 수 없다. 실재는 인간과 무관하게 존재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사유 없이는 드러나지 않는다.

우주 삼라만상이 존재하는 이유는 영원히 불가지론의 영역에 있지만, 우리가 사랑의 존재여부를 두고 고뇌하는 것처럼, 그에 대한 어떤 아름다운 의지가 있기 때문에 우주의 존재가치가 성립된다고 믿는다.

결국 나는, 실재를 절반쯤 인정하면서도, 나머지 절반만큼은 의심하는 자리에서 철학을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모든 철학은 내게 ‘진리’라 이름 붙은 무언가를 향한 끝없는 미로, 짐짓 발을 들이고 싶지 않은 영역이다. 다만, 내가 불멸을 탐구하게 된 십수 년 전의 계기와 그 해답에 대한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 그 미로에 발을 들여볼 뿐이다.

나는 "불멸"이라는 독립적 실재가 정말 존재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것에 대한 우리의 오래된 욕망을 들여다보려 했다. 우리의 육체는 결코 불멸에 도달할 수 없다고 확신하지만, 그와 별개로 만약 그것이 우리의 환상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이라면, "불멸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답해 줄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부분적 실재론’의 입장에서 불멸이라는 개념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를 탐색하려 했다.




불멸에 대한 탐구

2. 욕구와 욕망에 대해서

"욕구는 원칙, 욕망은 사다리"


욕구는 거스를 수 없는 생존의 원칙이다. 수천만 년에 걸쳐 생명세포에 각인된 어떤 생리학적 법칙이, 우리를 오늘의 존재로 진화시켜 왔다. 욕구는 인간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생명이 짊어진 존재의 조건이다.

물과 음식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고, 온혈동물인 우리는 사계절 적정 체온을 지킬 의복이 필요하다. 땅의 한기를 막아줄 바닥판, 눈비를 막아줄 지붕과 벽체가 필요하고, 지붕을 세울 기둥과 보벽이 필요하다. 그렇게 비로소 집이 세워지면 또 수면이 필요하다. 그뿐인가. 그다음엔 안정된 삶의 조건을 추구한다. 이는 실재론적 관점에서도 분명하다. 우리가 그것을 욕구라 부르든 다른 이름을 붙이든 상관없이, 물과 음식, 체온 유지, 거처의 필요는 생물계에 실재하는 조건이다.

그렇게 욕구라는 이기심의 요람 속에서 자아는 보호되며, 자라난 자아는 결국 관계가 범람하는 외부세계로 나아간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아를 구별하고, 그 안에서 인정받고자 자아의 '표상'을 성장시킨다. 그 과정에서 일정 수준의 좌절과 포기, 자신과의 타협이 점철되면, 우리는 비로소 자아실현을 넘어 타인을 위한 초월적 욕구로 나아갈 가능성을 갖게 된다.


욕구가 실재론적 토대 위에서 모든 생명에게 강제되는 조건이라면, 욕망은 반대로 상징과 언어, 타인의 시선이 있어야만 성립한다. 욕구는 실재의 법칙이지만, 욕망은 상징계의 환영幻影이다.


라캉은 말했다.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Man's desire is the desire of the Other."

욕망은 결코 충족으로 끝나지 않는다. 타인으로부터 형성된 결핍으로부터 욕망은 비롯되고, 그 욕망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스스로 만족할 줄 모르며, 채워진 순간 또 다른 결핍을 부른다. 타인이 제시한 새로운 기준이 이전의 욕망을 무력화시키고, 또 다른 욕망을 끌어낸다. 밑 빠진 독처럼, 욕망은 끊임없이 새로이 채워져야만 하는 항아리-결핍의 산물, 혹은 상징적 질서-와 같다.


左. 매슬로 욕구이론 기반의 피라미드와 엘더퍼의 ERG이론 | 右. 2차원 피라미드와 3차원 사다리


「인간은 언어와 사회적 질서로 이루어진 '상징계' 속에서 살아가며, 이는 종종 '타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실재론적 욕망은 이러한 사회적 관계와 환상에서 벗어나, 자신의 근원적인 결핍과 진정한 욕망을 마주하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비록 '실재'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더라도,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직시하고 추구하려는 과정 자체가 자아실현의 길이 된다. 요컨대, 실재론적 욕망은 사회적, 문화적 틀을 넘어 근원적인 욕망을 향해 나아가려는 인간의 행위를 의미한다.」- 라캉의 주장


라캉의 이론은 내게 어떤 형상을 떠올리게 했다.

2차원 평면으로 그려진 피라미드 위에, 새로운 차원-3차원-으로 세워진 사다리의 이미지.

욕구는 피라미드다. 생존이라는 뿌리 깊은 원칙 속에서 단계적 지침을 따르게 한다.

욕망은 사다리다. 평면적 피라미드 위에서 특별한 '의미'를 향해 끊임없이 오르도록 부추긴다. 그 갈망은 예술과 철학, 종교와 정치로 인간을 이끌었고, 문명이라는 거대한 구조를 건설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결핍의 사슬로 탄생한 것이고, 그 사슬을 넘나들게 하는 도구가 바로 욕망의 사다리인 셈이다. 다만, 내가 말하는 '사다리'는 무한한 욕망을 극복하게 해주는 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그 무한한 결핍의 사슬을 '넘나들 수 있게' 해주는 장치일 뿐이다.


예를 들어보자.

그냥 음식이 아닌 남들이 먹는 특별한 음식, 오마카세 따위의 유행을 좇는다.

그냥 옷이 아닌, 유명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옷을 입고 싶다.

구석구석 전기가 들어오고, 물이 콸콸 쏟아지는 수도꼭지가 있는 집은 이제 의미가 없다. 남의 지붕이 내려다보이는 전망대 위의 집을 꿈꾼다.

이처럼, 욕망은 우리로 하여금 피라미드의 각 층계에서, 사다리를 올라 타인의 욕망을 좇게 한다.

그러나 사다리의 높이의 한계가 정해져 있으며, 그 끝에는 결코 다다를 수 없다. 욕망의 효용에도 한계가 존재한다.


욕망은 더 새로운 것, 더 많은 것, 그리고 끝내 가질 수 없는 것들을 향해 끊임없이 우리를 밀어붙인다. 그리고 우리는 그 밀어붙임에 휘말려 '의미'를 갈구한다. 그 의미는, 결국 언어가 부여하는 상징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 상징은 때때로 '이름'으로 굳어진다. 그 이름들은 대부분 철학이 제거된 언어들이다.

욕망의 대상은 우리 삶 속에서 타인에 의해 이름 붙여진 것들이고, 그 이름은 거의 항상 부재不在의 철학, 결핍의 언어다.

결국,

욕구는 지상에 붙들린 살아감의 원칙이고,

욕망은 하늘로 향하는, 결코 만족에 이를 수 없는 사다리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우리 언어의 한계가 우리 세계의 한계를 결정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때때로 철학이 제거된 언어로만 "행복"-범인류적 가치, 자아초월의 충족-이라는 관념을 충족시킬 수 있으므로. 그리고 행복이라는 관념이 어쩌면 실재론이 보장하는 외부의 질서가 아니라, 언어가 그려낸 경계의 내부에만 머물러 있는 것일 수도 있으므로….


소론 : 욕망의 사다리는 인간이 불멸, 사그라들지 않는 행복을 향해 내미는 손길의 형태이기도 하다.




불멸에 대한 탐구

3. 행복에 대해서


나는 종종 기회가 생기면, "철학자들의 허세에는 귀 닫고 사는 편이 좋다"라고 말한다, 철학-직관적이지 않고 명확한 답이 없는 질문을 반복하는 일-은 행복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은 건방진 꿈을 채우려는 욕망을 타고났다. 그 마음 괴로운 일을 행복이라 여기며 살아가는 단순하지 못한 사람이다.

내가 타고난 욕망, 그 엇된 꿈은 영원불변의 행복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욕망이라 이름 지어둔 것처럼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욕심이다. 행복에 대한 건방지고, 부주의하고, 오만한 꿈이다.


채워진 욕구는 더 이상의 갈망도 부르지 않는다. 비워진 갈망의 자리에는 덧없는 행복이 남는다. 그래서 욕구의 충족은 행복이라기보다는 "결핍의 일시적 소멸"에 가깝다. 배부름 뒤에 배고픔이 다시 찾듯이.


한편, 욕망이 빚어내는 행복은 훨씬 더 복잡하다. 그것은 단순한 충족이 아니라, "충족되지 않는 결핍을 좇는 과정," 그 속에서 느끼는 희열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욕망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곳에 도달했을 때 또 다른 결핍을 발견하고 또 다른 사다리를 세우는 것,

허무의 늪에 빠져 높은 곳을 향해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는 것….

과정에서 우리는 끝없이 자아를 확장시키며, 부풀려진 자아를 통해 행복감을 얻기도 한다. x축으로 나아가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결핍의 충족이 오르내리고, 바로 그 반복적 진폭의 면적에서 행복 드러난다.


左.결핍의 충족상태가 결정하는 행복도 | 中.이상적인 행복 상태 | 右. 불규칙적 욕망충족의 반작용


욕망 성취의 절정은 공허함-불행에 가까운 상태, 우울증 등-으로 이어지기 쉽다. 사다리의 가장 높은 칸은 결국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는 절망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행복으로의 도달은 일종의 경계 상태에 놓인다. 욕망의 날개로 가장 높이 비상하는 순간, 동시에 추락의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우울증의 다양한 원인들 중 행복에 대한 강한 기대감도 자리 잡고 있지 않은가. 때로는 행복한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곧 다가올 행복의 소멸에 대한 일종의 예기애도반응anticipatory grief을 겪기도 한다.


결국 행복이란 욕구의 충족에서 오는 소소한 안도감과, 욕망의 끝없는 비상을 통해 얻는 희열이 서로 충돌하는 지점에서 나타난다. 욕구의 단순한 채움이 주는 안락함과 욕망의 무한한 갈망이 빚는 긴장 속에서, 우리는 불완전한 행복을 경험한다. 그것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순간적이고 불완전한 절정이다.

이렇듯 “행복”은 욕구와 욕망이라는 두 원리의 교차점에 있다. 욕구가 우리를 지상에 붙들어 생존하게 한다면, 욕망은 우리를 하늘로 끌어올려 스스로를 초월하게 한다. 그러나 초월의 순간은 곧 추락의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행복은 완전한 충족이 아니라, 결핍과 충족이 동시에 존재하는 날카로운 긴장 속에서만 실재한다.


그런데,

이 긴장을 완화하거나 완전히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실재론적으로"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감각과 이성, 언어로 아직 담아낸 적 없는, 필멸을 극복한 영원하고 완전한 행복의 어떤 절대적 조건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 불멸행복을 논하기에 앞서, 나는 우리가 극복해야 할 필멸에 대해서 확인할 것들이 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반드시 사라지는 것이다. 그날의 꿈속에서 빛났던 두 개의 필멸자들처럼, 탄생 직후부터 정해진 소멸의 운명이다.


행복에 대한 욕망은 결국, 시간의 제약을 넘어선 ‘불멸적 상태’에 대한 은밀한 동경과 닮아 있다. 그러므로 필멸에 대한 이해와 인정이 선행되어야만 했다.




불멸에 대한 탐구

4. 필멸에 대해서


필멸에 대해 인정하는 일이란, 그것의 본질적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태어나는 순간 시간은 짧든 길든 죽음을 향해 흘러가고, 우리는 그 시간의 유한성 바깥에서 실존할 수 없다. 독일 현대철학자이자 나치당원이었던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Sein zum Tode라 칭했다. 그는 《존재와 시간》에서 죽음을 존재론적 가능성이라고 규정한다. 즉, 죽음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불가피한 종말이면서도, 동시에 우리의 존재를 온전히 직면하게 하는 마지막 가능성임을 선언한 것이다. 전후맥락은 명확하지 않지만, 나는 그의 그러한 체계 안에서 필멸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영역을 찾아냈다.


하나는 허무와 공포의 영역이다. 죽음은 모든 것을 무력화시키는 힘처럼 보인다. 그것 앞에서 삶은 덧없고 무가치하게 느껴진다. 우주도 영속하리라는 확증이 없는데 티끌에 지나지 않은 인간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부분적 실재론이고 뭐고 간에, 허무와 공포의 영역 안에서는 어떤 물질도 관념도 무가치하다. 행복과 사랑, 불멸과 필멸 따위의 관념을 운운하는 일조차 아무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다른 하나는, 오히려 필멸을 인정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생명의 영역이다. 우주만물이 필멸하기에, 찰나의 순간과 미물의 존재가 소중해진다. 사랑, 우정, 행복, 죽음... 모든 관념의 창조가 의미를 갖게 된다. 철학이 논하는 인식, 윤리, 아름다움, 초월적 존재, 논리 따위의 것들도 끝없이 확장된다. 그것들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직시하게 된다.


필멸을 인정한다는 것은 단순히 다가오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아니다. 사라짐 그 자체, 혹은 우리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한동안 지속되다가 언젠가 사라질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크리스티안 하위헌스는 무려 17세기말, 지금으로부터 대략 삼백 년 전 수학자였다. 나는 당신이, 그가 예찬하는 필멸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보길 바란다.


「그렇게 고공에서 지구를 내려다볼 수만 있다면 집을 떠나 먼 나라로 여행하는 사람들처럼 우리도 집안 구석에서 벌어진 일들의 잘잘못을 더 잘 판단할 수 있을 것이며, 더 공정하고 올바른 평가를 내려서 결국은 모든 것들에 더 합당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구만큼이나 사람들이 잘 살고 있고, 잘 꾸며진 세계가 한둘이 아니라 여럿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이 위대하다 일컫는 것들에 찬미를 보내지 아니하게 되고 또 일반 사람들이 정성을 쏟아 추구하는 자질구레한 것들을 오히려 찬미하지 않게 될 것이다.」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천상계의 발견》중에서.


그가 고공에서 내려다본 우리의 작은 행성은 온갖 찬미의 대상과 찬미하지 아니할 대상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나는, 그가 자신의 자아초월적 소망을 언어적으로 더 높은 층위에서 서술한 것이라고 본다. 그의 말을 내 식대로 다시 말하자면 이렇다.


「우리는 사소한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더 큰 관념적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더 넓은 범주 안에서 합당한 가치를 지니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것들을 인식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진정 위대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고, 무가치한 것들을 구별할 수 있다.」


그는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인식론적 관점에서 "고공에서 내려다보는" 시도를 통해 미학적, 윤리적, 형이상학적, 그리고 논리적으로 바라보며 요컨대 철학을 관통하며 필멸의 아름다움을 예찬한 것이다.

그의 그러한 철학적 통찰에 따르면, 필멸에 대한 인정은 삶을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소한 것들로부터 멀어져 삶의 영역을 넓히고 더 농밀하게 만들어주는 철학적 용기인 셈이고, 그것-필멸에 대한 인정-은 모든 것들이 영원하지 않으리라는 허무와 공포의 영역을 벗어나, 우리에게 주어진 빛을 붙잡는 생명의 영역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인 셈이다.




불멸에 대한 탐구

5. 영원에 대해서


"영원불멸永遠不滅" :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하고 계속됨


불멸과 나란히 선 영원이라는 단어는, 무한한 시간계와 그 안에서 변화하지 않는 실체 또는 실재적 관념에 대한 막연한 감각을 내포한다. 그러나 그 막연한 감각은 단순한 직관이라기 보단, 우리가 세상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언어와 개념을 통해 구축한 상징체계에 가깝다. 따라서 나는 필멸의 원수이자 불멸의 아버지와 같은 시간의 영속, '영원'에 대한 최대한 단순하고 직관적인 고찰을 시도했다.



하나. 과학적 관점 : 물리적 실체로서 '영원'은 없다. 그러나.

현대 과학은 "영원한 것"을 상정하지 않는다. 행성과 별, 생명체 모두 유한한 시간의 축 위에서 생성되고 소멸한다. 우주 전체를 보더라도, 극도로 증가한 엔트로피는 우주의 모든 에너지의 균등한 상태, 즉 '열적 죽음heat death' 상태에 이르게 한다. 열적 죽음이란, 물질과 물질 사이의 에너지는 더 이상 교환되지 않고, 변화와 작용 반작용 등의 질서가 발생하지 않는, 정지상태를 의미한다.

언뜻 보기에는 그 정지상태는 영원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지만, 그것은 절대적 의미로써의 '영원'이 아니다. 물질과 에너지는 끝없이 전환되는 것이므로, 정지상태는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영원한 불변의 상태는 아닌 것이다.

다만, 이는 물질-존재-의 소멸을 뜻하지는 않는다. 물질과 에너지는 형태를 바꾸며 전환될 뿐, 총량 자체는 소실되지 않는다는 보존법칙이 여전히 작동한다. 이런 점에서 우주는, ‘영원한 변화의 부재’와 ‘존재의 지속’이라는 역설적 상태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둘. 철학적 관점 : 플라톤의 이데아와 인식의 한계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인간의 사유와 감각을 초월하는 영원불변의 완벽한, 참된 세계-가 '실재'한다고 상정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이데아 역시 결국 언어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인간의 사유체계 안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본다. 단순하게 말해서, 플라톤도 인간일 뿐이기 때문에 그가 창조한 '영원불변의 완벽한 세계'도 그 존재를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데아가 아무리 초월적 실재라 하더라도 그것을 설정한 것은 인간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전쟁 없는 영원한 평화-영구평화-를 역설했던 칸트는 '영원'을 애시당초 '시간'과 대치시켰다. 시간은 무한대를 향해 끝없이 흐르는 것, 즉 변화하는 것이지만, 영원은 그 자체로 변화할 수 없는 단일의 상태라고 여겼다. "영원은 시간 밖의 개념?" 그것은 인간의 인식을 초월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우리는 직관적으로 '영원'이라는 언어가 주는 감각을 인지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래서 추측컨대, 그는 시간을 인간의 감각이 경험적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영원은 선험적-인간의 경험 이전-으로 존재한 것으로 정의한 듯하다.

칸트의 철학에 있어 영원이란 필수불가결한 개념이다. 그가 호출하는 '완전한 신'은 시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영원을 내포하고 있다 할 수 있고, 그가 주장하는 도덕적이고 영적인 완전성은 '불멸'해야 하기 때문에 그 불멸의 상태가 변함없이 지속되는 영원이 필요하다. 비록 그의 사상이 대부분 종교적 관점 안에서 완성되어 있지만 그 사상 안에서 창조된 '영원불멸'의 세계는 지금도 사유되고 있기에 실재한다 할 수 있다.


반대로, 하이데거는 영원을 실체로서 인정하지도, 가정하지도 않았다. 앞서 언급한 대로, 그는 오히려 우리가 필멸적 존재이기 때문에 유한한 시간성을 자각하고 초월적 존재를 사유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한 소녀의 이미지를 떠올려보라.

소녀의 왼손은 실타래를 쥐고 있다. 그것으로부터 하나의 실가락이 뽑아져 나와 위태롭게 시간선을 따라 흐르고 있다. 그것의 이름은 '당신의 삶'이다.

소녀의 오른손은 가위를 쥐고 있다. 가위는 실가락에 아슬아슬하게 닿아있다. 그것의 이름은 '운명'이다.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소녀의 이름은 '죽음'이다.」



셋. 종교적 관점 : 초월적 실재와 무아無我의 교차점

대체적으로 종교는 시공을 초월한 존재를 상정한다. 기독교의 유일신은 시간 밖에 존재하는 영원불멸의 실체이며, 힌두교에서는 브라만-힌두교 최고신 브라흐만이 인격화한 남신-이 우주의 근원적 실재로 간주된다. 시공을 초월한 존재는, 앞서 언급된 칸트적 사유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 영원이 시간계 외부, 인간의 경험 바깥의 실재로서의 존재하는 것이라면, 신도 시간계 외부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다만 그 대상이 '영원'이 아닌 '신'이라는 점만 다르다.

불교의 경우엔 조금 다르다. 불교는 영원한 자아-신을 포함한 인격체-의 존재를 부정한다. 언뜻 '윤회'로써 자아가 죽음을 초월하고 부활하는 것처럼 해석될 수 있으나, 무아無我의 교리에 따르면 고정된 실체로서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는 연기-緣起, 인과법칙-에 따라 형성되고 사라진다. 윤회는 자아의 이동이 아니라, 인연의 흐름으로 인해 다음의 존재로 이어지는 것을 뜻한다. 불교는 인간을 포함해 신적 존재의 자아도 영속하지 않는다고 보지만, 인연적 연속성은 긍정하는 셈이다.


「촛불을 떠올려보라.

초는 당신의 육체, 불꽃은 당신의 영혼이다.

불꽃이 또 다른 초에 옮겨진다.

그 다른 초는 또 다른 육체다.

그러나 옮겨 붙은 불꽃도 또 다른 영혼이다.」


넷. 인간적 관점 : '의미'의 지속, 그리고 '상징'의 영원성

영원이라는 단어가 당신에게 어떤 기억을, 어떤 감정을 떠올리게 하는지?

나는 영원한 행복을 꿈꾸는 것처럼, 제멋대로 이름 붙인 수많은 것들에 대해 영원히 사라지지 말라고 명령한다. 사랑이나 슬픔은 물론이고, 감각을 압도하는 예술, 훌륭한 사상가의 안녕까지도 영원하길 바란다. 다행히 그런 나의 소망은 대부분의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는 듯하다.

인간에게 있어 '영원'의 의미는 우리의 기억, 감정, '상징'-예를 들면 기원전 화산재에 파묻혀 서로 껴안은 채로 죽은 두 모녀의 시신을 두고 영원한 사랑과 결부시키는 것-과 연결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역사·문화·언어적으로 전승되며 지속되어 왔다. 일종의 '의미의 지속'성을 형성하고, 그건 경험적 한계 내부에서만큼은 '의미의 영원'성을 내포한다.



결론.

"과학은 영원의 실체를 부정하며, 철학은 영원을 사유의 한계와 개념으로 다루며, 종교는 초월적 실재로서의 영원을 상정하고, 우리 인간은 상징과 기억 속에서 영원을 사유한다."

당초 마음먹었던 단순하고 직관적인 고찰은 결국 하나의 마침표로 끝나는 문장을 남겼다. 하지만, '영원'은 각기 다른 언어의 층위에서 다른 의미를 지니며, 그 의미들은 전체가 상충하기도 했지만 부분이 포개어지기도 했다.

뜻하지 않게, 내게 중요한 결론이 하나 남게 되었다.


"필멸과 불멸의 사이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는 '영원'은, 허무와 공포의 영역생명의 영역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우리의 인식과 언어, 소망의 내부에서 꿈꿔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눈을 감는다. 푸른빛붉은빛이 일렁이던 그 밤으로. 그들의 춤사위 속에서 나는 불멸의 실체를 찾으려 했다. 어쩌면 불멸은, 사라지는 순간에도 춤을 멈추지 않는 두 빛의 리듬 속에 숨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로소 그날의 꿈이 남긴 의문에 대해서 답을 줄 준비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



불멸에 대한 탐구

6. 사랑의 마력에 대해서


나는 영원한 사랑을 꿈꾸면서도, 영원한 사랑은 없다고 믿었다. 그것은, 한여름 뙤약볕에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리지 않길 바라는 아이의 마음이다. 그리고 그것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죽음을 마주하는 노인의 마음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사랑도 마찬가지일 뿐이었다.

사랑은 허약하고, 그래서 필멸하며, 그래서 덧없고, 그러므로 영원한 사랑을 꿈꾼다는 것은 헛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불멸은 어디에 있을까, 무엇을 두고 불멸할지어다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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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인간 경험의 가장 심층적인 차원에서 작동하는 실존하는 현상이자 관념이다.

그것은 단순한 감정적 상태가 아니라, 우리가 시간성과 유한성 속에서 스스로를 초월하려는 시도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흔히 사랑의 시작을 ‘화학적 반응’으로 설명한다. 실제로 사랑은 생물학적, 신경화학적 요인들이 강하게 작동한다는 것을 나는 인정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나의 이 「상사병」의 실재를 이해할 수 없었기에. 그러나 이러한 화학적 사랑에는 명확한 유통기한이 존재한다. 열병처럼 오르내리는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필멸하며, 관계는 본질적으로 다른 방식을 요구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사랑은 생리적 차원을 넘어 정신적 사랑의 영역으로 움직인다.

화학적 불꽃이 사그라든 자리에 남는 것은 서로의 내면을 이해하려는 노력, 긴 시간의 흐름 속에 쌓이는 신뢰, 그리고 불완전한 욕망과 행복을 끝까지 감내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이 정신적 사랑이야말로 관계를 지속시키는 근본적인 힘이다. 다시 말해, 사랑은 감각적 충동에서 시작해 의식적 선택으로 전환되며, 그 선택의 반복 속에서 지속성, 영원성을 획득한다.


영원성의 언어적 상징을 획득한 사랑은, 이제 당연하게도 필멸불멸의 경계에 선다. 우리의 육체와 감정은 필멸의 법칙에서 자유롭지 않지만, 사랑은 그것을 통해 불멸의 흔적을 생산한다. 사랑은 언어, 기억, 예술, 실천이라는 형태로 전승되며 우리 인류의 역사와 정신의 토대에 각인되어 있다. 이 점에서 사랑은 시간성을 초월하지 않으면서도, 시간성 너머의 차원을 지향하는 특이한 우주적 운동이다. 필멸적 존재가 불멸을 상상할 수 있는 바로 그 틈에, 사랑이 작용한다.


사랑은 또한 자유성과 단순성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 진정한 사랑은 타자를 소유하려는 욕망을 벗어나, 타인의 자유를 보장한다. 사랑은 복잡한 조건이나 계산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사랑은 단순히 ‘그가 거기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바로 그 단순성 안에 깊은 자유와 행복의 원칙이 내재한다. 이는 곧 사랑이 우리의 의지와 욕망을 초과하는 차원에서 작동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랑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양면성 또한 간과해선 안 된다. 사랑은 우리를 고양시키는 동시에 파괴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그것은 우리에게 헌신과 용기를 부여하지만, 동시에 고통과 결핍의 심연으로 이끈다. 그 사랑의 마력은 하나의 빛이 아니라,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장에서 펼쳐진다. 이 양면성은 때때로 사랑을 비극적이면서도 숭고한 것으로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랑 속에서 영원한 행복불멸의 사랑을 꿈꾼다. 이는 단순한 감정적 욕망이 아니라, 유한한 존재가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그 너머를 지향하려는 근원적 충동의 표현이다. 화학적 사랑이 사라진 후에도 정신적 사랑이 지속되고, 그 사랑이 흔적을 남기는 한, 이러한 꿈은 공허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그러므로 내가 꿈꾸는 영원한 행복, 불멸의 사랑은 헛되지 않았다.
"사랑의 마력은 우리가 필멸의 세계 속에서 불멸을 사유할 수 있게 하는, 가장 근원적이고 유일한 힘이기 때문에."



*



불멸에 대한 그날의 의문.

그 답은, 그날 꿈에서 봤던 태초의 별빛 속에도, 신화 속 신들의 세계에도, 종교의 약속 속에도 명확히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불멸이 ‘저 너머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전제를 의심해 왔다. 어쩌면 불멸은 저 먹지같이 하늘을 덮고 있는 어둠, 그곳에 촘촘히 박힌 별빛이 아닐 것이었다. 다만, 무언가 사라지고 남은 흔적 속에서 가늠할 수 없는 형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리라 생각하곤 했다.


푸른빛붉은빛의 춤사위는 짧았지만, 지금도 선명한 그 광경은 한때 존재했다가 사라진 한낱 꿈이 아니라, 구태여 붙잡지 않아도 나의 기억과 사유 속에서 계속 빛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불멸은 실체가 아니라, 기억되고, 이야기되고, 사랑받는 방식으로 지속되는 사건이 아닐까.


그날 꿈에서 직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별빛은 이미 수천 년 전에 방출된, 별들이 남긴 과거의 흔적이다. 우리가 하늘을 올려다볼 때 보는 것은 현재의 별이 아니라, 오래전에 발화되어 이제서야 도착한 과거의 빛이다. 그것들의 실체는 이미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아득히 먼 과거에 소멸했을지도 모른다.


사랑도, 삶도, 관계도 줄곧 같은 것이었다. 한순간의 만남과 이별, 격렬한 감정의 춤사위, 영원을 속삭이던 달콤함은 결국 시간 속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들이 남긴 이 빛조각들은, 나의 기억과 언어를 통해 빛이 되어 나에게 도달하고 있다. 이 빛이야말로 필멸의 세계가 불멸에 닿는 방식임을 알았다.


불멸은 밖에 있지 않다.
그것은 태양-우리의 사랑스러운 별-의 저편이나 '허무와 공포의 영역', '생명의 영역' 같은 그런 초월적인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숨겨져 있지도 않다. 아니, 어쩌면 누군가의 마음속에는 숨겨져 있을 수도... 그것은 우리의 내면에 새겨지는 기억, 의미, 사랑의 잔광으로 존재한다.


푸른빛붉은빛이 남긴 것은, 꿈의 말미에 짙게 깔린 끝없는 어둠이 아니었다. 그들이 한때 서로를 향해 타올랐다는 사실 자체였다. 그날의 꿈은 단순한 환영이 아니라, 불멸이 ‘형태를 바꾸어 지속되는 방식’을 보여준 일종의 은유, 어둠 속에 숨어든 비밀스러운 암유暗喩였다.



*



"불멸은 어디에 있을까, 무엇을 두고 불멸할지어다 말할 수 있을까?"


십수 년의 시간이 흘렀다. "세월"이라 이름 지어도 나쁘지 않을 시간이다.

그 오랜 시간 동안 그 의문을 헤집으며 살아왔다.

마침내 나는 이해하게 되었고, 이제 그 답을 내린다.


"불멸은 그곳에 있었다.

사라진 것의 자리에서, 그러나 여전히 빛이 되어 내게 도달하는 방식으로."








「그러므로 나는 잊혀진 사건들에게조차 끊임없는 해석을 내어 놓으며 회귀를 요구한다. 사라지지 말지어다, 명령한다.」



*



의문에 답을 구하고 나서야, 일전의 기록이 떠올랐습니다. 그땐 분명 아니었지만 지금 돌아보니, 사랑에 대한 아쉬움을 적어낸 것이었더군요.


떠나간 한때의 사랑은 시간과 기억에 스며들어 사라진 듯했습니다.

하지만 그 빈자리는 공허함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은은한 별빛 같은 흔적이 되어 마음의 눈길에 닿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눈 감은 밤 멀리서 파동하는 그리운 목소리로 들려왔습니다.

때로는 무심코 스친 바람에 실린 향기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나, 시간을 초월해 왔습니다.


오늘도 당신에게 요구합니다.

부디 잊히지 않으시기를.

사라지지 마시기를.

빛이 되어 내게 다가오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