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감을 조립하려면 설명서가 필요하다. 내가 원하는 모습의 장난감이 탄생하려면 서로 연관이 없는 조각들을 이어 붙여 하나의 의미로 구성해야 한다. 이토록 심오한 행위를 도와주는 길잡이 역할을 동봉된 사용설명서가 수행한다. 때문에 장난감 조립에 있어 설명서의 중요성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대개 값비싸고 품질이 좋은 장난감은 사용설명서까지도 굉장히 친절하고 세세하다. 글로벌한 인기가 있는 장난감은 설명서도 n개 국어를 구사한다. 그러나 싸구려 장난감은 품질도 좋지 않은데 설명서까지 불친절하다.
무언가 새로운 일을 하기 위해서는 내부적인 마음가짐도 중요하지만, 반드시 사용설명서와 같은 외부적 서포트가 필요하다. 수학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수학적 개념을 익혀야 하고, 영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단어와 문법을 익혀야 한다. 기초적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그 어떤 쉬운 예제를 맞닥뜨려도 해결할 자격이 없다. 우리의 하루하루도 그렇다. 처음 해보는 일은 누군가가 그 일에 접근할 수 있는 기초적 루트를 차근히 제시해주지 않는다면 해낼 수 없다.
그러나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알기를 바란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를 배워도 열 가지의 일을 수행하는 사람을 선호하고 중용한다. 이런 사람은 똑똑한 사람과는 결이 다르다. 똑똑한 사람보단 똘똘한 사람이라고 불러야한다. 똑똑한 사람 중에 똘똘한 사람이 있을 확률이 높을 뿐 똑똑하다고 다 똘똘한 것은 아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야무지고 일처리가 빠릿빠릿하고 마인드가 건강한 사람이 인정받는다.
왜 그런지는 의문이지만 난 어렸을 때부터 똑똑하다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나는 결코 우수하게 똑똑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보이는 태도나 임팩트가 워낙 특이해서 주변인들이 자연스레 그렇게 느낀 것 같다. 난 소심한 데다 모범생 이미지가 강했고, 성적도 크게 변동 없이 중상위권을 유지하다 가끔 뜬금없이 1등을 했기 때문에 공부를 잘한다는 이미지가 깊게 박힌 것 같다. 심지어 난 만화영화도 본 적 없고 게임도 자주 안 했으며 음악도 전혀 안 들었다. 어렸을 적 나의 삶은 공부 아니면 밖에서 친구들과 뛰어노는 것이 전부였기에 바른 생활 이미지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부터 도움 요청을 참 많이 받았다. 친구들은 잘 모르는 게 있을 때 그나마 유식할 것 같이 생긴(?) 나에게 물어보았다. 그때마다 나의 대답은 '모르겠어'였다.
실제로 난 아는 게 별로 없었고, 지금도 물론 아는 게 없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할 줄 아는 게' 없다. 똑똑하긴 했는데 똘똘하지 못하고 띨띨했다. 어려서부터 좁게만 살아와서 많은 경험을 하지 못하고 살았던 것 같다. 굳이 내가 여기저기 나서지 않아도 나의 삶은 잘만 흘러갔기 때문에 단조로운 태도로 하루를 살았다. 노력하지 않아도 의식주가 보장받았고 그런 삶이 영원히 이어질 것 마냥 빈둥빈둥 살았다. 그러다보니 삶의 경험치가 전혀 없다. 체크카드 발급하는 방법도, 러닝머신 작동시키는 법도 여태 모르다가 요즘 알게 되었다.
어릴 때는 내가 뭐라도 된 줄 알았다. 내가 책상에 앉아서 공부만 하면 사람들이 나를 치켜세웠다. 화가 날 때 욕을 쓰지 않은 것뿐인데 사람들은 '쟤가 정말 착한 아이야'라고 말했다. 일찍 일어나서 학교에 간 것뿐인데 성실한 아이라고 평가받았고, 어른들에게 인사 몇 번 했는데 예의 바른 아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난 내가 진짜 그런 사람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았다. 지금은 아니다.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나의 능력은 정말 하찮다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는데 사람들이 나를 최고로 인정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부풀려지고 있는 게 싫었다. 언젠가 나의 부끄러운 민낯이 드러날 것이 두려웠다.
사랑도 해본 적 없다. 누군가에게 진심을 보여준 적도 없다. 누군가를 미워하지도 않았고 누군가로부터 미움받은 적도 없다. 그래서 가끔은 두렵다. 내가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지 두렵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기본적 요소를 알지 못하면서 사는 것이 괜찮은지 모르겠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미지의 것들을 향한 능력은 어떻게 체득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두렵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는 걸까? 내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맞는 걸까? 사용설명서가 있다면 쉬울 텐데 인생이라는 조잡한 장난감은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지 않아서 슬프다.
어른의 문턱을 넘었지만 난 여전히 그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 초록 신호등이 환하게 켜졌는데 아직도 주저한다. 시간은 칼같이 흐르는데 알지 못하는 것이 많기 때문에, 반드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두렵다. 발이 닿지 않는 수영장 한가운데서 느끼는 공포가 엄습했지만 옆 레인에서는 각종 영법을 뽐내며 물을 박차고 헤엄치는 사람들이 많기에 나만 뒤쳐지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저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잘 살아갈까.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며 힘차게 사는 사람들의 삶이 궁금해진다. 나는 뭘 놓치며 살아왔던걸까. 내가 미처 챙기지 못한 것이 무엇일까. 왜 난 할 수 있는 것이 없을까. 의미있게 산다는 건 뭘까? 어떤 꿈을 꾸며 사는 것이 맞는 걸까? 확실한 답은 없다지만 최선의 답은 있을거니까. 근데 그 최선은 무엇일까.
좋은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살아야할까? 꿈을 이루려면 어떻게 살아야할까? 최선의 삶은 무엇일까? 수많은 말과, 책과, 강연에도 해답은 없고 나의 마음 속에도 해답이 없다. 모르는 채로 살아가는 것이 맞는 걸까? 살다보면 감이 잡히는 날이 오기는 할까?
누군가 내게 다시 돌아간다면 몇 살 때로 돌아가고 싶은지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정자 시절이라고 말한다. 조금만 늦게 달려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모르는 것 투성이인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태어난 이상 자연스럽게 요구되는 책임과 기본 역량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매일을 혼란 속에 살며 스스로 배우려고 발버둥친다. 그렇게 오늘도 조금씩 조금씩 배워간다.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여전히 많다. 나도 너를 모르고 너도 나를 모른다. 나도 나를 모른다. 모르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