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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초록 Jan 08. 2023

하루총평

유난히 안 풀리는 날이 있다. 평소 같으면 대수롭지 않게 넘길 일에도 부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별것 아닌 사소한 자극에도 마음이 크게 요동치는 날이 있다. 마치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앞에 둔 것처럼 불편한 답답함이 느껴지고, 원인불명의 가슴 통증을 해소하고픈 욕구가 생기는 날. 오늘은 내게 그런 날이다. 해결할 수 없는 난제를 맞닥뜨린 것처럼 왜인지 호흡 하나하나가 막막하다.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다 어딘가 답답한 마음에 혼자 앉아서 멍을 때렸다. 멍을 때리는 일은 이젠 내게 너무 익숙한 일이다. 외부에서 낯선 요인이 과하게 침입하면 난 항상 개인적 시간을 가지면서 혼란함을 가라앉히려 노력한다.


오늘은 문득 내 마음이 체 같다는 생각을 했다. 체에 혼합물을 거르면 깨끗하고 순수한 것은 밑으로 빠져나가고 쓸모없는 불순물만 체에 남는다. 나는 어떤 상황에 당도해도 좋은 의미를 쟁취하지 못하고 자꾸만 나에게 해로운 것을 건져내고 있었다. 찐득한 불순물이 남은 거름종이와 같이 나의 마음은 점점 더러워졌다. 마음에 미세한 구멍이 나면서부터 나의 심장은 체와 같은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 가족들과 가까운 곳으로 가볍게 여행을 갔다. 그러다 외국 느낌이 물씬 풍기는 상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내부가 너무 아기자기하고 예뻐서 SNS에 업로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얼른 카메라를 들고 안을 누비며 사진을 찍었다. 밥을 먹으면서 그 사진을 SNS에 올렸는데 이내 곧바로 삭제했다. 이 사진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대외용 사진을 찍는 내 자신의 모습이 그날따라 어색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카메라를 들고 어떻게 하면 더 멋있어 보이는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고민할 시간에 차라리 나 자신에게 집중하면서 그 시간과 장소와 분위기를 온전히 즐기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 사진만 집중하다 상점 내부를 만끽하지 못해서 아쉬웠다.


오늘 하루도 내게는 그런 의미였던 것 같다. 내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닌 카메라로 세상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찍은 사진이 남들에게 어떻게 하면 더 멋있게 보일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산 것 같다. 그러면서 나의 카메라는 더 아름답고, 더 남들의 입맛에 맞는 구도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불변하는 사실이 있고, 가변하는 사실이 있으며, 개인의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사실이 있다. 우리가 나이를 먹는 것은 불변 사실이고, 우리가 질병에 걸리는 것은 가변 사실이며, 나의 태도와 감정 상태는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지는 사실이다. 체와 같은 나의 마음은 이 세 가지 사실을 모두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불변하는 사실의 절대적 힘에 좌절하고, 가변하는 사실의 예측 불가능함에 혼란스러워하고,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사실은 제어하지 못한다. 정의를 내릴 수 없는 복합적 문제가 어렴풋이 있지만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번뜩이는 해결책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 오늘이다.


긴 멍 때리기 끝에 일단 나에게 집중하기로 결론을 지었다. 눈앞에 있는 카메라를 치우고, 코 끝에 걸친 안경을 벗고, 두 눈을 똑바로 뜬다. 시력이 안 좋아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지만 시야가 더 넓어졌기에 괜찮다. 누군가에게 평가되는 삶이 아닌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하는 삶. 나라는 사람의 장점은 극대화하면서 단점으로 가득한 정체성은 저버리지 않으려 노력해 본다. 구멍 뚫린 마음도 내 마음이기에 끝까지 갖고 가려고 한다. 모든 것이 두렵고 막연하게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다 죽어가는 해바라기처럼 흉하게 남을 수는 없다.


오늘은 오랜만에 연청바지를 입은 날이다. 난 연한 청바지의 색이 참 마음에 든다. 그런데 모두가 이 색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럼 나만 좋아하면 그만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양한 색을 바라고, 갈망하고, 동경하며 살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보편적이지 못하더라도 전혀 상관없다. 내가 좋아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게임 캐릭터를 여러 명 만들 때 모든 캐릭터를 동일하게 만들지 않는다. 각각의 독특한 외양과 능력을 한 사람씩 갖추게 한다. 나의 개성과 성격이 작고 소소할지라도 그저 감사하며 살기로 다짐해 본다.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여러 사실들과 구멍 뚫린 나의 마음을 불평하지 않고 인정하면서 감사함으로 받아들인다. 나의 한계가 뚜렷하나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본다. 그리고 조금 더 나 자신에게 집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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