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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초록 Jan 11. 2023

공존

우리는 살아있을까? , 잘 살아있다. 드넓은 지구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다양한 인간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숨을 쉬며 살아간다. 나 역시 명확하게 살아있지만, 가끔은 내가 진짜 살아있는 것이 맞는지 헷갈릴 때가 있다. 살고 있지만 동시에 죽어있는 것도 있고 이미 죽었지만 다른 형태로 살아있는 것 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이 반드시 육체적인 의미만을 가지지는 않는다. 지금 내가 쓰는 이 글은 독자가 읽음과 동시에 살아나고 독자가 읽기를 완료함과 동시에 죽는다. 그렇다면 이 글은 살아있을까, 죽어있을까? 삶과 죽음은 단순히 육체적 생명의 존재와 부재 여부를 가르는 기준만은 아 것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방식 하나하나가 삶과 죽음의 복잡한 기준선을 넘나들고 있다.


모든 문제가 Yes or No라는 단순한 두 가지의 대답으로 도출되면 만족스럽겠으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런 평이한 대답을 요구하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무척이나 방대하다. '매우 그렇다, 그렇다, 보통이다, 아니다, 매우 아니다' 따위의 말장난으로도 어떤 질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삶과 죽음 또한 그렇다. 상당한 고차원적 시공간과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물음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더욱 모호하게 만든다. 이토록 경계가 모호하다보니 삶과 죽음의 두 상태 사이에 관한 질문은 객관식으로 대답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굉장히 애매모호한, 마치 그라데이션 같은 난해한 서술형 대답으로 이 어려운 질문에 답해야 하는 상황이다.


생명체의 주검을 방부 처리한 뒤 실제 생명체의 모습과 같도록 하나의 표본으로 제작하는 것을 박제라고 한다. 박제 표본은 전시용, 과시용, 수집용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생물학적 기록용과 연구용으로도 사용된다. 어떤 용도로 박제되었든 간에, 이렇게 박제되어 현재까지 겉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동물은 과연 살아있을까, 죽어있을까? 난 죽어있다고는 답을 못할 것 같다. 생명체의 숨은 끊어졌을지 모르나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 새로운 차원의 숨통을 트인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이미 죽은 동물이 다른 양태의 삶을 영위하는 한 가지 방법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죽은 것들이 반영구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방식은 굉장히 다양하다. 살아있는 인간들은 재미있게도 죽은 것들에게서 의미를 찾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는 수학여행 코스에 박물관이 있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어린 내게 박물관이라는 장소는 따분하고 꽉 막힌 학습의 장이었다. 학교에서도 매일 공부를 하는데 수학여행을 와서도 박물관에서 역사 공부를 해야 한다니! 그래서 어렸을 때는 전시를 관람하지 않고 박물관 앞 잔디마당에서 놀거나 주변 매점에서 군것질을 했다. 요즘에는 박물관의 진정한 재미와 의미를 알고는 박물관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과거 세상의 잔존물을 현재에서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니. 알지 못하던 세상을 새롭게 접하고 알아가는 재미가 무척 벅차고 흥미롭다. 박물관 또한 이미 죽은 과거의 것들이 현재에서 삶을 영위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유산들은 과거의 지위보다 더 고결한 의미를 현재에서 새롭게 갖는다. 유무형의 문화유산 삶과 의미를 영위하는 방식이다.


무덤 앞에 놓인 비석도, 미술관 한편에 걸린 미술작품도, 광장 가운데 자리한 동상도,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클래식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문학작품도 모두 과거와 현재 사이의 경계가 모호한 것들이다. 분명 과거의 것이지만 현재에서 더욱 풍성한 의미가 창조된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러한 이미 죽은 것들을 통해 삶을 살아가는 다양하고 뜻깊은 방식을 체득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어떻게 죽어야 할지를 굉장히 심도 있게 고민한다. 셰익스피어는 죽었지만 그는 소설을 통해 여전히 숨을 쉬고 있고, 드뷔시는 죽었지만 그는 음악을 통해 여전히 존재감을 드러낸다. 라이트 형제는 죽었지만 그들의 열정은 지금도 하늘을 날고 있으며, 세종대왕은 죽었지만 그의 명석함은 지금도 우리의 의사소통에 녹아있다. 과연 우리는 이들이 죽었다고 확실히 단언할 수 있으려나?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읽는 우리는 당당하게 나는 살아있다 주장할 수 있을까?


삶과 죽음은 이토록 불분명한 것이다. 단순한 육체적 삶과 죽음 너머의 분명한 경계를 정할 수 없는 질문들이 참으로 많다. 심장은 죽었는데 뇌가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고, 뇌는 죽었는데 혀만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 삶과 죽음은 어디에나 공존하며 절대적인 살고 죽음은 없다. '매우 살았음, 약간 살았음, 보통임, 약간 죽었음, 매우 죽었음' 같은 말장난도 없다. 나는 세상 모든 것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요즘은 어떤 것도 절대적인 것이 없음을 깨달았다. 초록색이 누구에게나 초록색인 것은 아니다. 적록색맹을 가진 사람의 세계에서는 초록색은 곧 빨간색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같은 테니스공을 보고도 노란색으로 느끼는 사람이 있고 초록빛이 도는 형광색으로 느끼는 사람이 있듯이 모두 상대적인 관점의 차이다. 삶과 죽음 또한 너무나 상대적이다.


이렇게 삶과 죽음의 두 가지 차원이 정도의 차이에 따라 심히 복잡하게 얽혀 공존하고 있기에 세상은 너무도 다양한 모습을 띠며 굴러간다. 나는 어떤 사람의 삶을 소설로 비유하고는 한다. 태어남과 동시에 첫 문장이 적히고 죽음과 동시에 끝 문장이 적히면 하나의 소설이 완성되는 것이다. 만약 나의 생각처럼 세상 모든 사람의 삶이 소설이라면, 그만큼의 인물, 배경, 사건이 생성된다. 그리고 한 소설을 가로지르는 스토리는 다른 소설의 스토리와 서로 얽히면서 정말이지 개성 있는 이야기로 작성된다.


친구가 핫도그를 먹다가 자기 손가락을 소시지인 줄 알고 콱 씹어버린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어떤 사람의 소설에는 손가락을 씹은 우스꽝스러운 인간의 겉모습(말, 표정, 몸짓)이 서술될 것이고. 어떤 사람의 소설에는 손가락을 씹은 순간 느끼는 속마음(감정, 통증)이 서술될 것이다. 손가락을 씹은 사건은 얼핏 절대적인 한 가지의 사건으로 보일 수 있으나 실은 한 가지 사건을 두고도 시선에 따른 얼마든지 다양한 평가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 모든 것은 각자의 특색 있는 시선과 관념에 따라 무한 가지의 모습과 의미를 지니게 된다. 시작과 끝도, 위와 아래도, 새로움과 낡음도 모두 절대적 양극단을 달리는 개념이 아니다. 끝이 곧 새 시작이며, 어떤 것 위에 있는 것은 어떤 것의 아래에 있으며, 새로운 것은 그 즉시 낡은 것이 된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하듯, 그리고 한 사건을 향한 평가가 상대적이듯,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좋고 나쁨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가 한 가지 일을 대하는 태도도 조금은 긍정적으로 변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 별 일 아닌 것 같은 일도 시간이 지나면 큰일이 되기도 하고, 당장은 무겁고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일도 지나고 나면 별 것 아니게 되듯이 말이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두고 지나치게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어영부영 살다 막상 그 두려운 일을 꽤 만족스럽게 해치우고 난 뒤 괜한 걱정을 했다고 자책한 경험이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절대적으로 나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닫는다면 걱정과 근심은 조금 내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좋고 나쁨, 그리고 행복과 우울은 그 정도의 세기를 나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소설에 '나'라는 인물이 어떤 느낌으로 서술되든 내 알 바 아니다. '나'의 소설의 주인공은 오직 '나'. 동시에 '나'는 주인공이 고통받는다면 얼마든지 소설의 흐름을 역전시킬 수 있는 작가의 역할도 할 수 있기에!


끝내주게 깔끔히 청소된 화장실은 안방보다 훨씬 깨끗하지만, 안방보다 화장실이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무척 모호하고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다. 여러 차원의 삶과 가치가 병존하는 우리네 세상은 무한한 경우의 수가 지배하고 있기에 상식이 비상식이 되기도, 비상식이 상식이 되기도 한다. 마치 깨끗한 화장실에는 슬리퍼를 신고 들어가면서 더러운 침대에는 맨발로 올라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과연 상식을 지키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일까? 이 역시 대답하기 어렵다. 좋고 나쁨은 무척 상대적이니까 말이다.


결국 우리는 단순하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단순하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이다. 무척 복잡한 메커니즘을 가지는 신체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무척 복잡한 세상에서 자신만의 복잡한 의미를 찾고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죽은 것들에게서 살아있는 의미를 찾고, 살아있는 것들에게서 쥐 죽은 듯한 적막을 느끼며 사는 것이다. 단순하게 사는(단순한 것 같은) 삶도 어떻게 보면 다방면의 역량을 갖추기 위한 치열한 삶이기도 하고, 갓생 같은 삶도 다시 보면 한 가지 목표로 귀결되는 단순한(단순해 보이는) 삶이기도 하다.


그 무엇도 마냥 단순한 것이 없고, 그 무엇도 감히 확언할 수 없다. 점과 같은 단순무식한 존재는 없다. 모든 것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공존한다.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 공존하는 단순하지 않은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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