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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초록 Jan 14. 2023

저는 잘하는 게 많습니다

초중고를 가리지 않고 새학년이 되면 어김없이 작성하는 것이 간단한 자기소개서다. 학생들이 자기소개서 작성을 모두 끝내면 얼마 후에 담임선생님께서 학생들이 작성한 내용을 바탕으로 개인적인 상담을 시작하신다. 자기소개서에서 주로 묻는 인적사항, 가족관계 등은 객관적인 사실이므로 답하기 어렵지 않다. 그런데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나를 괴롭힌 문항 두 가지가 있는데, 바로 특기장래희망이다.


간단한 자기소개서에 어김없이 국룰 질문으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취미와 특기다. 취미는 사실 답변이 매우 쉽다. 잘하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즐기는가?를 묻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무렇게나 지어내도 문제 될 구석이 없고, 사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면서 즐겨하는 것쯤은 하나씩 가지고 있다. 만약 자신의 첫인상을 고상하고 우아하게 설정하고 싶다면 독서나 클래식 감상 등이 취미라고 답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특기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내가 얼마만큼 잘해야 특기라고 명명할 수 있는지에 관한 기준이 굉장히 모호하다. '난 뜨개질이 특기예요'라고 말하는 사람보다 뜨개질을 잘하는 사람은 널리고 널렸다. 나는 평소에 글을 쓰는 것을 즐기지만 감탄이 절로 나오는 수준급 글을 쓰지는 않는다. 나는 친구들과 축구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상대팀 에이스보다 드리블을 잘하지 못한다. 과연 이런 것들을 특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저는 벽에 붙은 모기를 기가 막히게 잘 잡아요~'라고 말하거나 '저는 엄마 몰래 새벽에 라면을 꼬들하게 잘 끓여요'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장래희망도 마찬가지다. 장래희망은 특기의 연장선이다. 도레미도 모르는 사람이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고 말하면, 아마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 애써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꿈은 크게 가져야지 하하 지금부터 노력하면 넌 멋있는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을 거야 파이팅!'이라며 에둘러 희망의 메시지를 전할 것이다. 그러나 능력이 뒷받침해주지 않는 꿈은 무가치하고 비현실적으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난 특기와 장래희망을 적는 칸에 무슨 글자를 채워 넣어야 할지 정말 많은 고민을 했다. 난 분명히 잘하는 것이 없었고, 그래서 꿈도 사치처럼 느껴졌다. 애매한 재능은 잔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이 '넌 커서 뭐가 되고 싶냐?'라고 물으면 항상 호기롭게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물론 진심으로 과학을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생 때 읽은 학습만화책에서 과학자들이 흰 가운을 입고 실험하는 모습이 멋있어서 과학자는 명예로운 직업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내가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하면 어른들이 너무 멋있다며 칭찬해 주셨다. 지금은 과학자라는 장래희망을 폐기했다. 과학자가 되기 싫은 것이냐고? 아니다. 특별하게 잘하는 것이 없어도 꿈을 이룰 수 있는 법을 배웠고, 단순한 명사형 장래희망 너머 더 큰 가치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난 왜 장점이 없을까?'라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실제로 장점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지나치게 겸손해서 자신을 스스로 낮추어 객관화하는 습관이 있다.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과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자신의 순위를 낮춘다. 이런 사람들에게 칭찬을 해주면 무슨 독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칭찬을 당차게 부정한다. 어떻게 아냐고? 내가 그렇다. 친구들이 '넌 참 성실한 것 같아'라고 말하면 난 항상 '아냐, 난 집에서는 누워만 있어'라고 답했다. 그러면 친구들은 머쓱한 표정을 짓곤 했다. 내 딴에는 겸손한 태도를 보이려고 했던 것이지만, 지금 생각하면 왜 칭찬을 있는 그대로 즐겁게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객관적으로도 나는 남들보다 성실하지 않다. 그리고 객관적으로도 나는 남들보다 잘하는 것이 없다. 이것은 겸손도 아니고 자기 폄하도 아니라 팩트다. 실제로 난 어느 모임에 가든 딱히 남들보다 나은 게 없는 애매한 인간이다. 그러나 반드시 누군가보다 잘해야만 꿈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후부터는 내가 무언가를 너끈히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다. 나 자신을 굳이 낮출 필요도, 그렇다고 지나치게 높일 필요도 없음을 알게 되었다.


분리배출을 할 때, 각각의 쓰레기들은 저마다의 자리가 있다. 스티로폼이 음식물 찌꺼기보다 깨끗하니까 더 고결할까? 페트병은 재활용이 되지만 일반쓰레기는 불에 태워질 운명이니까 페트병이 더 고귀한 쓰레기일까? 그냥 다 같은 쓰레기다. 단지 그 유형이 다를 뿐이다. 우리들도 그런 것 같다. 굳이 남과 비교하지 않아도 되는 너무나 매력적인 각자의 특징이 있고 그 특징이 곧 한 사람의 능력이자 특기가 된다.


웃음이 예쁜 것도, 손이 따뜻한 것도, 몸에서 좋은 향기가 나는 것도 특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자리가 있고, 그 자리는 곧 꿈을 향한 출발점이다. 이러한 꿈은 직업과는 결이 다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자신만의 특징을 활용해 소망하는 가치를 완성하는 삶이다. 잘하지 않아도 할 수만 있다면, 즐길 수만 있다면, 가치를 완성하는데 조금의 부족함도 없다. 나는 과학자라는 꿈을 버렸지만 과학을 활용해 바람직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새로운 꿈을 꾼다. 과학을 잘해야만 바람직한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과학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그것은 곧 능력이자 특기가 되고 꿈을 이루기에 충분해진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뻥 뚫린 도로를 달리며 음악을 듣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굳이 1종 면허를 따지 않아도 된다. 2종 면허도, 원동기 면허도 충분히 꿈을 이루기에 충분하다. 면허가 없어도 뒷좌석에 탈 수 있고, 차량이 없으면 자전거를 탈 수 있고, 자전거를 못 탄대도 두 발로 달릴 수만 있다면 꿈을 이룰 수 있다.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그것을 잘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남과 비교하며 자신을 갉아먹지 않아도 된다. 내가 사랑하는 가치를 이루기에 우리가 가진 작은 능력은 충분하고도 남는다. 우리는 제법 잘하는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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