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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초록 Feb 04. 2023

2월 같은 사람들

2월은 짧다. 대부분 28일로 끝이 나고, 마치 올림픽처럼 4년에 한 번씩 하루의 추가시간이 주어진다.


열두 달 중 나와 가장 닮은 달을 하나 꼽자면 2월인 것 같다. 2월은 짧아서 다른 달에 비해 어딘가 연약하고 부족한 느낌이니까. 그렇지만 2월은 나약해서 오히려 귀엽다. 열두 형제 중 막둥이 같은 느낌이랄까? 왠지 사랑받아야 할 것 같고 지켜줘야 할 것 같다. 우리가 가진 약점도 충분히 귀여운 매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낮에 타는 버스와 밤에 타는 버스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나는 늦은 밤에 타는 버스가 좋다. 버스가 정류장과 신호등에서 멈춤과 출발을 반복할 때마다 승객들의 몸은 관성에 의해 앞뒤로 쏠린다. 버스가 과속방지턱과 고르지 않은 노면을 지날 때마다 승객들의 몸도 덩달아 덜컹거린다. 백발의 어르신부터 건장한 청년까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힘에 저항하지 못해서 손잡이를 꽉 쥐는 모습이 재밌다. 정말 많은 승객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있지만 아무도 옆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에 최선을 다한 사람들의 엄숙한 침묵이다. 최선을 다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시간에 치인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늦은 밤. 지극히 까만 도로를 가로지르는 버스 한 대. 몸과 마음이 다친 사람들이 이용하는 사이렌 없는 구급차.


이 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한 승객들은 잠자리에 누워 어떤 생각을 할까? 어쩌면 하루를 거세게 살았던 나머지 몸을 누이자마자 단잠에 든 승객도 있을 것이고, 어쩌면 하루를 쓰라리게 살았던 나머지 앞날에 대한 걱정이 물밀듯 찾아와 잠에 못 드는 승객도 있겠지. 어쨌든 한 가지 분명한 건, 모든 승객이 자신의 삶에 진심이었다는 것.


아침이 오면 승객들의 삶은 한층 자라 있을까? 아쉽게도 그렇지는 못한 것 같다. 여전히 똑같은 버스 정류장에서 똑같은 번호의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맨 뒷자리 구석에 앉아 창문에 머리를 대고 오늘도 같은 풍경을 마주한다. 도로에 그어진 실선이 빠르게 휙휙 스치며 직선을 만든다. 잠은 자도자도 부족해서 덜컹거리는 창문에 머리를 박은 채 꾸벅꾸벅 존다. 더 나은 삶이 되기를,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살았지만 변함이 없는 삶의 풍경. 내가 내릴 목적지는 분명한데, 하차벨을 눌러야 할 타이밍은 정확한데, 왜 나는 아직도 나의 여정에 확신이 없을까. 내가 가야 할 삶의 목적지는 어디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잠에 들면 가끔은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치기도 한다.


확신이 서지 않는 나날을 산다. 마치 인생을 가장 멋있게 사는 한 가지 방법이라도 있는 것 마냥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이 맞는 걸까 의심하며 산다. 내 마음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겸허히 수긍하겠다 다짐하면서도 밤이 되면 어제 들었던 노래를 또 듣다 눈물이 찔끔 나오기도 한다. 가끔은 자기 전에 눈을 질끈 감고 마법 주문을 외우기도 한다. "눈을 뜨면 동화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세요!" 현실을 도피할 수 있는 마법 같은 건 없는 듯하다.


지금껏 살아온 삶에 확신이 없고, 지금의 처지와 모습에 자신이 없고, 앞으로 내가 걸어야 할 길이 흐릿하게 보일 때가 많다. 어쩌면 우리는 막막함 한 스푼을 마음 깊은 곳에 지니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하늘에 콕콕 박힌 구름 조각이 너무 예뻐서 슬퍼질 때가 있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을 제대로 살고 있지 못한 것 같아서 말이다.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완벽한 행성에 불시착한 것 같은 느낌.


그래도 난 답이 없는 나의 삶이 너무 좋다. 공부에는 끝이 없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공부해도 더 공부해야 할 것이 끊이지 않고 등장한다는 말이다. 그렇다, 우리는 항상 어딘가 모자란 존재. 완벽과 정답 따윈 애초에 없는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있었던 걸까? 어쩌면 지구라는 행성은 2월 같은 사람들이 사는 곳일지도 모르겠다. 모자란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 정답을 추구하며 사는 행성. 우리가 이토록 바보처럼 산다. 이렇게 어리석고 멍청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매력적인 것 같다.


아직 우린 죽지 않았고 우리가 느껴야 할 사랑의 에피소드는 너무도 많다. 미련한 우리의 모습도 누군가에게 너무 특별하고 소중하다. 우리는 이토록 어여쁜 세상이 만드는 선물 같은 장면들을 온전히 즐기려고 이 사랑스러운 행성에 도착했으니까. 하찮아서 매력적인 2월 같은 사람들과 서로의 연약한 마음을 나누며 살려고 이 아리따운 행성에 불시착했으니까. 내가 걷고 있는 길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는 않지만, 나름 최선을 다해 선택한 길이니까 이제는 그만 의심해보고 싶다.


늦은 밤, 목적지도 손잡이도 없는 급행버스에 올라탄 우리는, 과속방지턱과 고르지 않은 노면을 지나며 하염없이 덜컹커리다 넘어지고 깨지고 피도 흘리겠지만. 그렇게 우리는 매일을 상처 속에 살겠지만. 그럼에도 결코 울지 않고 바보같이 웃으며 살아보려고 한다. 달리는 버스를 졸졸 따라오는 2월의 보름달에게 상처가 아물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빌면서 살아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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