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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초록 Jan 31. 2023

토마토 주스

오늘 저녁 귀갓길에 별생각 없이 우리 동네 대형마트에 들렀다. 평소 마트에 진열된 상품들의 디자인을 세심하게 관찰하는 것을 좋아해서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면 마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구경을 한다. 어렸을 때부터 자주 부모님 손을 잡고 왔던 마트라서 옛날 생각이 참 많이 난다. 이렇게 마트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보니 특정 상품의 디자인이 미묘하게 바뀌거나 평소에 보지 못하던 브랜드의 상품이 소리소문 없이 등장하는 것을 잘 알아차린다. 오늘은 원래 맥주를 팔던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1+1 행사상품을 진열하고 있길래 뭘 팔고 있는지 살펴보고 왔다. 여러 가지 상품들이 있었는데 유독 토마토 주스가 집에 도착할 때까지 머릿속에 진하게 남았다.


새해가 밝자마자 친구들의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술병 사진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합법적으로 음주가 가능한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친구들이 식사 자리를 가지면서 주류를 곁들이고 있었다. 사진 속 대부분의 친구들은 소주잔이나 맥주잔을 들고 있었고 술이 약한 친구들은 탄산음료를 한 손에 들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식사를 목적으로 식당에 갔을 때 잔에 따르는 것은 물(또는 차), 탄산음료, 주류 이렇게 세 가지가 대부분이다. 가끔 계산을 마치고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시거나 이따금 몇몇 식당에서 식혜나 수정과 따위를 마시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음료는 잘 마시지 않는다.


토마토 주스 하나를 사면 하나를 더 준다는 사실을 계속 곱씹으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문득 '왜 사람들은 토마토 주스를 즐겨마시지 않을까'하는 의문이 생겼다. 왜 사람들은 삼겹살을 구워 먹으면서 토마토 주스를 마시지 않고 술을 마실까? 왜 사람들은 피자를 베어 물면서 토마토 주스를 마시지 않고 탄산음료를 마실까? 왜 토마토 주스보다 오렌지 주스나 포도 주스가 잘 나갈까? 사실 어느 정도 이유를 알 것 같다.


토마토 주스는 일단 맛이 없다. 토마토 주스가 맛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진짜 맛있어서가 아니라 토마토 주스의 개성에 매력을 느낀 것뿐이다. 우리 엄마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생겼다고 말한다. 과연 나는 진짜 잘생겼을까? 물론 맞는 말이긴 하지만 엄마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좀 더 과장해서 말을 하신 것이다. 몇몇 사람들이 토마토 주스를 좋아하는 이유는 토마토 주스가 객관적으로 맛이 좋아서가 아니라 토마토 주스의 독특한 맛과 목 넘김이 매력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한 방에 둘러앉아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한 손에는 오렌지 주스를, 한 손에는 토마토 주스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고 상상해 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렌지 주스 뚜껑을 먼저 따서 컵에 따른다. 주스계 인싸는 오렌지 주스이기 때문이다. 토마토 주스는 호불호가 강하다. 토마토 주스는 주스계 아싸다.


호기롭게 반장 선거에 나갔는데 표를 가장 적게 받으면 무척이나 슬퍼진다. 학창 시절 반장 선거는 어느 정도 인기투표의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사실은 마냥 덤덤하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아무도 없는 방에 멍하니 앉아있을 때면 여러 가지 생각이 참 많이 난다. 어느 순간부터 어떤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던 탓에 난 지인은 많지만 친구는 그리 많지 않다. 난 초등학생 이후로 한 번도 누군가를 깊이 좋아한다는 감정을 느낀 적 없다. 누군가를 향한 일말의 호감이 생길 때마다 얼른 감정을 억눌렀다. 또 누군가가 내게 호감을 표시할 때마다 부담스러워서 피해 다녔다. 내 몸도 제대로 못 챙기면서, 내 감정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면서, 내 삶의 방향 설정도 제대로 못하면서 누군가와 더 깊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무례이자 굉장히 어리석고 미숙한 태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지 않았다. 지나가다 반갑게 인사할 수 있는 정도의 관계면 충분했다. 딱 그 정도의 관계가 편했다.


그래서일까. 사람보다는 사람이 아닌 것들에 더 관심이 갔다. 혼자 거리를 걷다 만난 이름 모를 꽃이 너무 사랑스러웠고, 꼬리를 흔들며 내게 다가오는 이름 모를 강아지에게 더 마음이 쓰였다. 찌그러진 딸기가 안쓰러웠고, 옆구리가 터진 곰인형이 불쌍했다.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사람이 아닌 것들과는 시간과 노력에 구애받지 않고 얼마든지 깊은 속마음을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글을 쓰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만약 내가 사람들에게 '토마토 주스는 너무 아싸인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면 반응이 어떨까. 아마 몇 번 웃어주면서 공감하는 척하다가 그대로 외면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을 글로 마음껏 적을 수 있는 게 너무 좋다. 마치 덩어리 진 생각을 토해내는 느낌이다.  


그렇게 살다 보니 안타깝게도 무게감 있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오렌지 주스가 되어 상큼하고 대중적인 맛으로 여러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어 나가는데, 나는 호불호 강한 토마토 주스가 되어 어느 누구의 선택도 받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다. 가끔 나의 독특한 맛을 좋아해 주는 특이 취향의 소유자들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아주 잠깐의 관심에 불과했다. 그 사람들도 목 막히는 식사 자리에서는 탄산음료 캔을 땄다.


이제는 나의 정체성이 토마토 주스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산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진다고, 내가 미처 갖추지 못한 것들에 후회를 남기며 두고두고 아쉬워할 바에 그냥 토마토 주스로 사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토마토가 맛은 없어도, 호불호가 갈려도, 그리 주목받지는 못한대도 나름 부드럽고 말랑말랑하니까. 손에 쥐고 조금만 힘을 주면 곧바로 찌그러져 터질 것만 같은 연약한 토마토지만, 그래서 더 조심스럽고 차분하게, 몸에 힘을 빼고 순하고 상냥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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