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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초록 Mar 22. 2023

삶은 계란

'삶은 계란이다'라는 말이 있다. 저녁 늦은 시간에 아무 생각 없이 삶은 계란 하나를 까서 먹다가 목이 텁텁해질 즈음에 갑자기 '삶은 계란이다'라는 문장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순간 멍하니 노른자를 바라보다가 정말로 우리의 삶이 계란하고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난 계란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계란말이나 떡국 고명 위에 올라가는 계란 지단과 같은 샛노란 계란 요리는 영 별로다. 누군가에게 '당신은 무슨 음식을 가장 좋아하시나요?'라고 물었을 때 밥을 제일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듯, 우리는 계란을 밥처럼 자주 먹지만 그렇다고 무척 좋아하지는 않는다. 계란은 맛있다는 느낌보다는 그냥저냥 무난한 음식이라는 인상이 강하기 때문이다. 소리 없는 강자 느낌이랄까? 단백질의 대명사일 뿐이지 맛있는 음식의 대명사는 결코 아니다. 그저 비빔밥 위에 올라가는 계란프라이나 오므라이스 위에 올라가는 계란 이불, 또는 냉면에 올려지는 삶은 달걀 반쪽처럼. 없어도 상관은 없지만 막상 없으면 굉장히 아쉬워지는 존재가 바로 계란이다.


우리의 삶도 그런 것 같다. 계란은 맛있다는 느낌보단 그냥저냥 무던하고 그럭저럭하다. 짜지도 않고 달지도 않고 맵지도 않다. 그다지 존재감이 있는 음식도 아닐뿐더러 대부분 메인 요리급의 무게감이라기엔 어딘가 부족하다. 나도 그렇다는 생각을 했다. 없어도 상관은 없는데 막상 없으면 아쉬워지는 사람. 누군가에게 '당신은 어떤 스타일의 사람을 좋아하시나요?'라고 했을 때 언급되지 않는 사람. 그렇다고 누군가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도 아닌, 얇디얇은 관심과 사랑을 받는 사람. 계란이 그러하듯이 나도 그런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무미건조하고 재미도 없지만 일단 있으면 좋은 사람.


계란은 굉장히 연약하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속담이 있듯이, 날계란은 조금의 충격만 받아도 쉽게 깨진다. 그러나 계란은 그리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다. 열을 받으면 받을수록 계란은 단단해지는 것이다! 게다가 계란은 열을 받는 시간에 따라 마음의 경도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열을 조금 받으면 반숙이 되고, 많이 받으면 완숙이 된다. 계란의 변신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넓적한 프라이팬에 올라가면 계란프라이가 되고, 끓는 물에 들어가면 삶은 계란이, 구워지면 구운 계란이, 찌면 계란찜이, 마구 섞이면 스크램블이, 돌돌 말면 계란말이가 된다. 심지어 세례를 베풀듯이 자신을 푼 물에 무언가를 신성하게 적시기도 한다. 계란은 연약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유연하게 바꿀 수 있고, 모든 모습 하나하나가 개성이 있다.


우리의 삶도 그런 것 같다. 모든 사람의 삶이 너무도 연약하나 제각기 다양한 매력이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열을 덜 받고 살다 보니 마음이 말랑말랑 아기처럼 순수하고, 어떤 사람은 열을 많이 받고 살다 보니 마음이 굳세고 성숙해서 듬직하다. 어떤 사람은 뜨거운 프라이팬에 몸을 지져 계란프라이가 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을 마구 부풀려 계란찜이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에라 모르겠다 자신의 삶을 마구 뒤섞어 스크램블이 된다. 또 어떤 사람은 따스한 계란 이불이 되어서, 이리저리 들들 볶여 지칠 대로 지친 볶음밥 같은 사람들을 사랑으로 덮어주기도 한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비록 날계란 같이 연약하나,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계란은 병아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알이다. 만약 부화 조건이 적절하게 갖춰진다면 생명이 탄생할 수 있다. 그 순간부터는 계란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게 된다. 무려 닭이라는 고품격 식재료(?)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당신은 무슨 음식을 가장 좋아하시나요?'라고 물었을 때 드디어 언급될 수 있다. 남녀노소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치킨이 될 수도 있고, 먹기만 해도 기력이 진하게 샘솟는 것 같은 백숙이 될 수도 있고, 생각만 해도 침이 고이는 닭발이 될 수도 있다. 이외에도 닭강정, 닭꼬치, 닭똥집, 닭갈비, 닭볶음탕 등등 계란 요리와 비교하는 것이 실례인 것만 같은 화려한 라인업을 자랑한다.


우리의 삶도 그런 것 같다. 적절한 조건이 맞춰지면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갈 수 있지만, 우리를 따스하게 품어줄 어미가 없다. 어떤 계란은 어미의 배 아래에서 부화하여 용맹한 닭으로 자라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하지만, 우리는 타의에 의해 세상 밖으로 나와서는 열만 잔뜩 받으면서 산다. 내가 될 수 없는 모습을 묵묵히 직시해야 하고, 적은 관심과 사랑에 한없이 감사해야 한다. 나는 세상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계란과 같다고 생각한다. 닭이 되지 못하고 계란으로 사는, 여전히 어미의 체온을 갈구하는, 그렇게 점점 생명력을 잃어가는, 분명 유정란인데 무정란 같이 사는 보통의 사람들. 우리의 삶이 계란과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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