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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초록 Aug 14. 2021

밤의 유영

어린 시절의 나는 아마 자장가를 들으며 잠을 잤을 것이다. '아마'라는 단어를 붙인 이유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자장가를 들으며 잠을 청했던 기억은 없다. 그러나 요즘 한 가지 깨달은 것은, 어른이 된 우리는 스스로에게 자장가를 불러준다는 것이다. 자장가는 꿈나라로 가는 비밀 암호다. 그리고 꿈나라는 밤이 우리를 위해 열어준 비밀 세계다.


어릴 때는 왜 일찍 자야만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도대체 어린이가 9시 이전에 자야 한다는 사회적 약속은 누가 정한 것일까. 12시 정각이 되면 귀신이 나타난다는 믿음은 어떻게 습득되었으며 늦게 잘수록 키가 크지 않는다는 가설은 어떤 이가 제시했을까. 어떤 이유에서 밤은 어린 나에게 무서운 이미지의 소유자가 되어버렸던 걸까. 사실 밤은 착하고, 온순하고,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인데 말이다. 이런저런 이유가 덧붙고, 겉모습이 풍기는 묘한 기운에 오해가 오해를 낳아버린 것은 아닐까?


난 밤이 좋다. 뭐 별다른 이유는 없다. 어려서부터 빛나는 메이저보다는 외면받는 마이너에 더 눈길이 갔다. 주연 배우의 인생 서사보다는 길을 지나는 행인의 스토리가 더 궁금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더 좋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나 너 좋아해."라고 선언하는 순간 내가 그것을 좋아해야 할 이유가 하나씩 보이기 시작한다. 관심이 없을 때는 보이지 않던 숨은 매력들은 돋보기를 들이밀 때 드러나는 법이다. 밤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니까 밤의 장점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철없던 내가 이만큼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밤에 흘린 눈물, 밤에 품은 생각, 밤에 찾아온 후회와 다짐이 나를 성장시켰다. 어떤 유명한 작가의 책이나 능력 있는 상담사의 상담도 누군가를 성장시키기에는 역부족이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은 되도록 고통의 시간이어야 하고, 되도록 밤이면 좋은 것 같다. 왜냐하면 밤은 어둠을 선물하면서 우리의 시야를 좁히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것들은 보지 않아도 괜찮다고 속삭이면서. 그렇게 우리가 홀로 독특한 감정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새벽 시간의 시곗바늘 소리가 더 날카롭고, 밤공기에 묻은 습기의 묵직함이 편안함을 주는 것은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니다. 모든 것이 밤의 설계다.


아무런 걱정도 없이 편안하게 잠드는 사람이 더 이상 부럽지 않다. 몸은 아플수록 약한 것이지만 마음은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아프면 아플수록 사실 그게 정말 강한 거라고. 시답잖은 시선으로 미적지근한 위로를 받고 있는 이 세상 모든 아픈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전해주고 싶은 말이다.


밤은 우리에게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을 부여한다. 좋은 시간 보내라며 마실 것도 갖다 주고, 온습도도 알맞게 조절해주고, 혹시나 쌀쌀할까 담요도 쥐어주고, 알뜰살뜰 우리를 보살핀다. 때로는 빗소리 라디오도 틀어주고, 번개 카메라로 우리의 잠든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기도 하고, 어떤 날은 혹시 누군가의 꿈나라 여행을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침묵하며 지그시 바라보기도 한다. 그렇게 알맞은 환경을 갖추어준 다음 우리에게 시간을 맡긴다. "네가 하고 싶은 것 다 해봐. 어떤 것이든 떠올려보고, 달라진 너의 모습을 상상도 해봐. 사실 성장하지 못해도 좋아. 아무것도 못해도 좋아."


요즘 시간이 자유롭다. 다니던 학원을 그만두었고, 마침 방학인지라 매일이 토요일이다. 더 이상 주말이 주는 설렘은 없지만 일상이 주는 여유로움은 생겼다. 그러다 보니 가끔 자정이 지난 늦은 시간에 외출을 하기도 한다. 아무도 없는 거리를 거닐다 보면 문득 외로움이 찾아오기도 한다. 무언가 풍성하고 당연한 외로움이다. 밤늦은 시간에는 세상 모든 사람이 혼자가 되는 탓인지 모순적으로 외로움이 풍성하게 다가오는 듯하다.


일주일 전이었나, 밤거리를 거닐면서 문득 조금 공허하다는 생각을 했다. 알 수 없는 복잡미묘한 감정이 또다시 마음 깊은 곳에서 돋아났다. 익숙해질 만도 한데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그런 감정 말이다. 그러면서 이 세상 어떤 사람의 삶도 밤거리와 같지 않으려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외면받으며 사는 사람들의 삶이 밤거리 같았다. 차라리 나를 마음껏 밟아달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누구도 찾지 않는 쓸쓸한 분위기 속에서 밤거리는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야심한 밤에 그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걷는 일은 형용하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여기저기서 한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아침에는 음료수가 남아있는 캔에 맞아 어깨를 다쳤다면서, 늦은 저녁에는 뜨거운 담배꽁초에 데어 무척 아팠다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으면서, 나는 그들의 복잡한 감정을 잠재워주지 못한 불청객이 되었다는 생각에 부끄러워졌다. 나는 밤이 밤거리에게 선물한 고요한 시간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염치 없게도 딱 하나뿐이었다. 나에게 풍성한 외로움을 선물해줘서 고맙다는 말.


눈앞이 깜깜하다면, 지금은 정말 늦은 밤이다. 내일을 떠올릴 때 설렘보다는 불안과 외로움이 다가오는 우리의 밤이다. 그럴 때면 밤의 유영을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 오늘과 내일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밤에, 내가 오늘이라고 생각하면 오늘로 정의되는 밤에. 우리 잠시만 내일로 넘어가지 말고, 우리 잠시만 잠에 들지 말고, 우리 잠시만 무서워하지 말고, 몇 가지만 잠잠히 읊조리다 꿈나라로 떠나자.


크고 웅장한 세상의 내일을 생각하고, 그것보다 훨씬 작은 밤거리의 꽃을 생각하고, 고개를 들어 그것보다 훨씬 작은 별 하나를 바라보다 고개를 숙여 그것보다 훨씬 작은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자. 이제 알까? 사실 거꾸로라는 걸. 세상보다 크고 웅장한 꽃이라는 걸. 그것보다 더 큰 별. 별보다 더 큰 우리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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