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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초록 Aug 12. 2021

기억상처

언제였는지 잘 모르겠다.


어떤 평범한 한 해의 평범한 겨울이었던 것 같다. 정확히 겨울이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내 위에 몸을 포개고 함께 잠을 청했던 이불이 꽤 두꺼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윽고 흘렀던 눈물이 시야를 흐릿하게 했을 때 좁고 어두운 방이 꽤 운치 있게 보였던 것 같다. 방 안에 잔잔히 흐르는 적막의 선율이 귓구멍을 웅웅대며 돌아다닌 것 같기도 하다. 음, 그날은 분명히 겨울이었다.


흐릿한 눈물의 기억이 있다. 동기를 알 수 없는 울음이었는데, 과정은 참혹했다. 추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미화되는지라 지금의 나에게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갈 기회가 주어진다면 칼같이 거절하지는 못할 것 같다. 잠시 주저하다가 그래도 꽤 견딜만 했다고 생각할 것 같다. 우리는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기 때문이다. 괜찮다고 느껴지는 생각들만 선별하여 미래로 전송한다. 그러나 어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은 괜찮은 기억들에 빌붙어 함께 딸려온다. 마치 악랄한 컴퓨터 바이러스처럼.


나도, 당신도, 저편에 선 누군가도 저마다의 아픔을 숨기고 산다. 난 세상은 의사 없는 입원병동이라고 생각한다. 병환의 경중만 다를 뿐 모두가 크고 작은 수술이 반드시 필요한 환자들이다. 그러나 수술을 집행할 전문의는 없어서 민간요법이 팽배한 병동이다. 누구나 숨기고 있는 아픔이 있다는 뜻이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사실 곪은 속내를 가지고 있다. 잊을 수 없지만 그러려니 사는 아픈 기억들도 가지고 있다. 더듬을수록 이런 아픔의 순간들은 또렷이 떠오른다. 사그라드는 불꽃이 홀연히 불어온 바람에 되살아나며 집채만큼 타오르듯이.


한 번 생각해보자. 나는 지금껏 얼마나 많은 장소에 발을 디뎠는가? 정말 많은 장소가 떠오른다. 서해안에도 가봤고, 서울에도, 제주도에도, 이름 모를 장소까지도. 그 많은 장소에서 우리는 항상 행복을 맛보았는가? 시간과 장소와 사람과 분위기의 조합이 어떤 재질의 기억 조각을 남겼는가? 한 번 생각해보자. 어떤 뚜렷한 기억이 머릿속에 숨어있는지 말이다. 그 기억이 좋은 기억이라면 떠올리는 일이 흐뭇하겠고, 나쁜 기억이라면 아마 끔찍하겠다. 떠올리면 끔찍한 기억들을 나는 지금부터 '기억상처'라고 하고 싶다. 아물지 않아서 그냥 잊고 사는 그런 상처.


나도 물론 더듬으면 찡한 기억상처가 있다. 찾아보면 더 많을 것 같다. 그런데 굳이 그런 기억을 더듬고 싶지는 않다. 아픈 기억만큼 행복한 기억도 많기 때문에 행복한 기억만 쓰다듬고 싶다. 물론 어떤 기억상처는 무의식 중에 툭 튀어나오기도 한다. 어떤 평범한 밤에 울었던 기억은 왜 자꾸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난 아직도 눈물 젖은 베갯잇의 눅눅함을 잊을 수가 없다. 들썩거리는 심장과 내 마음속에서만 무너진 하늘을 잊지 못하겠다.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기억상처가 있다. 왜냐하면 세상은 항상 추운 겨울이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한 번 말한 적 있지만 나는 겨울이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난 겨울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건 잠시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이번만큼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겨울에, 우리들을 눈사람에 비유하고 싶다. 사실 눈사람에게 겨울은 최적의 생존 환경이다. 그러므로 추운 겨울 같은 세상은 눈사람에게 적절하다. 얼어붙을 것 같은 한기가 오히려 그들의 삶을 연명시킨다. 온 세상이 하얗게 덮이며 그들의 존재는 더욱 두드러진다. 우뚝 선 눈사람들에게 적수란 없어 보인다.


팔 한쪽이 없는 눈사람이 있다.


주변의 눈사람들은 몸집도 건장하고 팔다리도 튼튼하게 만들어졌지만, 이 눈사람은 어린 4세 꼬마 아이가 만들었다. 작고, 얼굴은 삐뚤빼뚤하다. 그나마 달린 팔 하나도 위태하다. 눈사람은 슬펐다.


시곗바늘이 한겨울을 향해 달려가면서, 눈보라가 거세지고 추위는 한층 깊어졌다. 그러나 눈사람은 다른 눈사람들처럼 털모자도 쓰지 못했고, 장갑도 끼지 못했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질수록 눈사람은 삐뚤한 모양 그대로 몸집이 조금씩 커졌다. 눈사람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은 더욱 길어졌다. 눈사람은 슬펐다. 그리고 추웠다.


모자 쓴 사람이 멀리서부터 입김을 뿜으며 눈사람에게 다가온다. 그러고는 무언가 화에 가득 찬 것처럼 눈사람을 이리저리 조각낸다. 눈사람은 죽었다. 그리고 행복했다.


겨울뿐인 세상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봄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봄이 무엇인지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으나 모두가 죽을 수 있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나쁜 마음도 아니었고, 눈에 독기가 차지도 않았다. 그저 눈사람은 자신의 몸이 산산이 흩어져 하얗고 아름다운 눈밭의 일부가 된 것이 무척이나 행복했을 뿐이었다. 이제야 아름다워진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황홀했을 뿐이다. 눈사람의 기억상처는 아물지 않고 남았다. 그러나 그 상처는 지극히 아름다운 순백의 눈밭 위에 눈꽃으로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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